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역시 세상일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다.
우리의 로드트립이 결정된 것은 2024.8.26일 오후 두 시에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부터였다. 요즘은 루틴이 된 오전 스타벅스에서의 글쓰기를 마치고 오후에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친구였다. 원래 이 친구와는 줌 드링킹(Zoom Drinking)을 종종 하는 사이다. 코로나 시국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이었을 때 화상회의 용 툴인 줌을 사용하여 각자의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젊은 층에서 한동안 유행이었다.
우리는 그 젊은이들의 아빠뻘이었지만 샌프란과 서울이라는 지리적 이유 때문에 줌 드링킹을 종종 하곤 했다. 젊은 친구들을 따라 한다는 건 주책맞은 짓이지만 안 보는데서 우리끼리 하는 거야 뭐 디지털 시대에 용서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한국인들의 소주 마시는 행위는 아날로그의 결정판이다. 따라서 처음엔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술맛이 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웬걸? 이제 웬만한 알코올에는 내성이 생긴 오십 대 아저씨들에게도 술의 환각작용은 여지없이 괴력을 발휘했다. 소맥 다섯 잔에서 소주 알잔으로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여기가 서울인지 샌프란인지가 의미 없을 정도로 공간에 대한 거리감은 거의 사라진다. 그렇게 익숙해지다 보니 코로나 때는 한 번 시작하면 서너 시간은 거뜬히 줌을 통해 떠들고 마실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이 특이했던 것은 보통 미국의 주말 밤시간을 고려한다면 한국시간 토요일이나 일요일 정오경에 줌드링킹을 했었는데 난데없이 월요일 낮 두시에 전화로 신청이 왔다는 것이다. 이미 오전에 목표로 했던 집필양을 마쳤던 터라 나도 부담 없이 친구의 요청에 응했다. 원래는 한 두 명 더 포함해 서 너 명이 하는 줌드링킹이었지만 갑작스레 이뤄진 탓에 누구를 더 부를 수도 없고 해서 둘만의 맞다이를 하게 되었다.
샌프란인가 서울인가가 헷갈리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지날 즘 난 친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내가 올해 안에 안 쓰면 소멸되는 마일리지가 35,000마일이 있는데 미국을 한번 갈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올해 7월 우리와 친한 동창 한 명이 미국 멤피스로 전직을 하게 되어 가을 즈음에 한 번 갈 수도 있다고 얘기는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툭 던진 내 질문에 샌프란 친구는 갑자기 폭풍반응을 하며 당장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꽤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대학교수인 이 친구는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이번 학기 수업이 없고 그 이유가 11월 1일 논문준비를 위해 파리를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9,10월은 수업이 없어 본인도 멤피스행에 동참할 수 있으니 이왕이면 날씨 좋은 10월에 와서 샌프란서 며칠 놀다가 멤피스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원래 나는 혼자 샌프란에서 이 친구와 있다가 혼자 멤피스를 갈 생각이었는데 친구가 같이 가 준다니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이미 개와 늑대의 시간이 지나 나는 늑대 성체로 충분히 변신한 이후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대한항공 앱에 들어가 있었고 다행히 10월 초에 마일리지 사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일초의 고민도 없이 항공편 예약버튼을 눌렀다. 이것으로 일단 10/5 ~ 10/20일 2주간의 미국여행은 확정이 되었다.
필이 받은 우리는 이 여행에 한 명을 더 동참하는 것으로 계획을 발전시켜 나갔다. 추가멤버는 우리와 같은 동창친구며 속세를 반쯤 떠나 성과 속의 경계선에서 명상과 마음공부(Mindfulness)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친구다. 국내 최고직장을 이미 십여 년 전에 스스로 나와 참선과 수행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가 미국여행에 응할까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반신반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줌 드링킹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우리는 고민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그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수행 중이던 그 친구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일단 생각을 좀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날의 줌드링킹은 그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샌프란 친구가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엔 줌드링킹은 하지 않고 전화로만 간단히 얘기했는데 요지는 샌프란서 멤피스까지 국내선 비행기로 이동하지 말고 차를 빌려 로드트립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행 중인 친구까지 3명이 로드트립을 하면 운전도 수월하고 재미도 배가 되니 금상첨화라는 것이었다.
50대 중반에 친구들과의 미국 로드트립이라... 한 번도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친구의 제안을 듣는 순간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관건은 수행자 친구의 결정이었다. 다행히 그 주 목요일 수행자 친구는 미국여행에 동참하겠다는 의견을 전해왔고 그 즉시 친구의 항공권 예약도 완료되었다.
이로서 모든 여행의 기본 얼개는 완성되었다. 한국에서 나와 수행자 출발, 샌프란서 친구랑 만나 렌터카 대여, 그리고 일주일간의 로드트립으로 멤피스 도착. 멤피스에서 주말을 보낸 후 다른 루트로 다시 일주일 간 샌프란으로 컴백.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 이 모든 것이 월요일 오후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인생에서 한 번 해볼까 말까 한 친구들과의 미국 로드트립은 심사숙고는커녕 그와 정반대인 무대뽀로 결정되었다.
역시 세상일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