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 맛보기
아이들과 ‘멋진 불평’ 을 글감으로 시를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선배들이 ‘불평’을 글감으로 쓴 시를 보여주었다. <친구>, <생각만>, <언행불일치>, <고기>, <공익>, <송곳>, <그만해 주세요> 이렇게 시 일곱 편을 띄워놓고 맛보기 했다. ‘이 가운데 어느 시가 마음에 와닿았는지?’ ‘그 시 어느 구석에 마음이 머물렀는지?’ ‘왜 그 대목이 좋았는지?’ ‘그 대목에서 글쓴이의 어떤 마음을 읽어 주었는지?’ 이야기 나누었다.
친구 / 연제고 2학년 정정모
내 친구 채언이는
우리 집 5층 위에 산다.
아침마다 만나서 같이 학교로 간다.
그런데 채언이는 시간을 어기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약속 어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기에
아침마다 화가 난다.
그래도 평생 볼 친구이기에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같이 담배 한 대 피고
학교로 왔다.
* 내 친구 중에도 시간을 자주 어기는 친구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도 화가 났다. 이 시에서도 화 나는 감정이 잘 느껴졌고, 또 이 시에서 “그래도 평생 볼 친구라서 아무 말 없이 학교로 왔다.” 하는 구절이 좋았다. 화가 나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라서 참아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서은)
생각만 / 연제고 2학년 서지민
시험 기간이다.
책상 위 종이가 어지러이 놓여 있다.
나는
그걸 몽땅 씹어 먹고 싶다.
아니 그냥 갈가리 찢고 싶다.
불태워 버리고 싶다.
재도 남지 않게
나는
종이처럼 가만 앉아만 있다.
* 내가 이 시의 화자라고 생각하니 책상 위에 종이들을 모두 폭발시키고 싶다. (도연)
* 시험 기간에 느끼는 무기력함이 떠오르고, 많은 종이만큼 할 것이 점점 쌓여가는 압박감이 잘 느껴진다. 한 것보다는 할 것만 늘어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늘상 그게 쉽지 않다. (지우)
언행불일치 / 연제고 1학년 한경호
시험을 갈았다 심하게
엄마한테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엄마가 한 말이 기억났다.
“시험 성적이 낮아도 당당하게 살아라.”
나는 당당하게
엄마한테 시험 성적을 말했다.
의외로 엄마가 웃음을 띄며
“괜찮아, 다음에 잘 치면 되지.”
이 말이 끝나는 순간
엄마는 단소를 들었다.
* 엄마의 따뜻한 말에 한순간 마음을 놓았지만, 곧바로 단소를 들었다는 반전이 내 경험과 비슷하다. (서영)
공익 / 사직고 1학년 목승후
오후 7시 10분, 야자 시간.
나는 우등생이라 이 시간에 학교에 남는다.
그런데 앞자리 준형이가 조용히 말을 건다.
“야, 게임이나 하자.”
어이가 없다.
공부하러 오는 곳에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게임을 하자니
그것도 야자 시간에 말이다.
나는 조용히 손으로 말했다.
“ X ”
그러자 준형이는 얼굴을 찡그리고
팔을 흔들며 갑자기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햐, 저 불량 학생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공부를 못 하겠는 걸.
기나긴 고민 끝에 준형이에게 말했다.
“들어와라.”
준형이가 씨익 웃었다.
* 나는 승후가 쓴 시에서 반어 말법에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공익’이라는 제목부터가 말뒤집기다. ‘우등생’ ‘이 성스러운 장소’ ‘저 불량학생’ ‘기나긴 고민 끝에’ 이 모두가 속마음을 뒤집어서 한 말이다. 이 말들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재미없다. (자행)
고기 / 경남여고 1학년 임혜진
우리는 고기다.
우리에게는 도장이 찍힌다.
1등급을 비싸게
9등급은 싸게 팔린다.
나는
팔리고 싶지 않다.
송곳 / 사직고 2학년 조민규
아침마다 입는 저 희고 검은 천쪼가리도
성적표 속 검은 잉크 몇 방울도
컨트롤C 커트롤V 한
개성 없는 이 직사각형 공간도
날마다 반복되는 이 일상도
우리의 뾰족함을 가릴 수는 없어
어디서든 언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보며 웃는 우리들을
* 교복을 ‘흰 천쪼가리’로, 성적을 ‘잉크 몇 방울’로, 교실을 ‘직사각형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깊다. 아이들이 뿜어내는 긍정적 힘과 희망찬 웃음을 송곳으로 표현한 점이 좋다. (민서)
* 이 시에서 ‘송곳’은 그냥 송곳이 아니다. 읽어 내려가는 사이에 뜻이 몇 다리를 건너간다. 낡은 틀을 깨부수는 뾰족함이었다가, 경쟁으로 갈라놓은 벽을 허무는 아이들 웃음이었다가,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시달림에도 흔들림 없는 꼿꼿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자행)
그만해 주세요 / 사직고 1학년 박성준
엄마, 전화 좀 그만해 주세요.
집 가고 있어요.
학원 늦게 마쳐서 그래요.
주무시고 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전화 좀 그만해 주세요, 엄마.
* 시험 기간에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좀 늦게 들어간 적이 있다. 휴대전화를가 안 울려서 엄마한테 부재중 전화가 9통이나 와 있었다. (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