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 온다고 하기에

by 구자행

요즘 국어 시간에 아이들과 공부하는 노래가 ‘임이 온다고 하기에~’로 들어서는 사설시조이다. 노래 온 마리를 모두 옮겨 보면 이렇다.


임이 온다고 하기에

저녁밥을 일찍 지어먹고

중문 나서 대문 나가

문지방 위에 달려가 쪼그려 앉아

손을 이마에 얹고 건너편 산을 바라보니

거무희뜩한 것이 하나 서 있기에

저것이 님이로구나 하고

보선 벗어 품에 품고

신발 벗어 손에 쥐고

곰븨님븨 님븨곰븨(엎치락뒤치락)

천방지방 지방천방(허둥지둥) 달려가서

정엣말 하려고 곁눈으로 힐끗 보니

지난해 칠월 사흗날

껍질 벗겨내고 추려 세워둔 삼대가

살뜰히도 날 속였구나

아서라! 밤이었기에 망정이지

행여 낮이었다면 남 웃길 뻔했다


먼저, 짜임새부터가 조선 전기 사대부들이 쓴 시조와 다르다. 4걸음 초․중․종장 석 줄 틀을 벗어던지고 훌훌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노래의 속살도 유교의 이념을 다지고 다지던 사대부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여느 백성들이 겪고 느끼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빗방울(김수업) 선생님은 이를 시조라 이름하지 않고 ‘만횡청’이라 하셨다. 양반들이 노래하던 시조와 맞먹는 새로운 갈래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이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열 번도 더 고개를 끄덕였지만, 교실에서 아이들하고 공부할 때는 교과서대로 늘 ‘사설시조’라 가르쳤다. 그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렸다.

“자, 여기서 잠시 인문학 특강이 있겠습니다. 사설시조가 탄생한 말미(배경)를 짚어볼까 해요.”

인문학 특강이란 말에 잠시 아이들 눈에 생기가 도는 듯.

“쌤, 시험에 안 나오는 거죠?”

“이거 필기 안 해도 돼요?”

아이들 말이 내 귀에는 잠자도 되는 거죠? 하는 말로 들린다.

“그럼요. 무장해제하고 들어요. 강의하는 건 내 권리고, 듣고 안 듣고는 온전히 여러분 권리니까.”

그렇다고 내가 자게 내버려 둘까. 잘 테면 주무셔 보시든가. 나도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마련해 둔 게 한칼 있걸랑.

“여기 노랫말 가운데 ‘삼대’ 있지요? 너희들 삼대가 뭔지 잘 모르지?”

“예.”

“내 어릴 적에 우리 동네에 삼밭골이라는 골짜기 있을 만큼 삼을 많이 심었어요. 온 산골짜기가 온통 삼을 심던 밭이었단 말이지. 우리 집도 그 삼밭골 끝자락에 있었어요. 내 어릴 적만 해도 삼을 엄청나게 심었더랬어요.

손가락 굵기만 한 삼대가 사람 키를 훌쩍 넘게 높이 자라요. 그러면 그놈을 낫으로 쪄서 잎을 추려낸 다음, 들판 가운데 가마솥을 걸어놓고 그놈을 삶아요. 삶아서 껍질을 벗겨서 그 껍질을 가늘게 다듬어요. 다른 건 대체로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를 얻는데, 요놈은 껍데기를 얻을 목적으로 심고 가꾸지요.

그 껍질을 가는 실이 될 때까지, 머리 빗는 솔같이 생긴 도구로 다듬어요. 그 실로 짠 베가 삼베지요. 삼베는 들어 봤지요? 죽은 사람 수의를 삼베로 짓지요.

그러면 껍질만 쓰고 남은 삼대는 버리느냐. 그럴 리가. 그것은 또 잘 말려서 갈무리해 두었다가 초가집 지붕 이을 때 썼어요. 민속촌 같은 데 가서 초가집 지붕 본 적 있지? 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이었는데, 그 짚이란 게 힘달가지가 없거든. 그래서 그 아래에다 삼대를 엮어 받쳐야 해. 제주도 민속촌에 가니까 갈대로 받쳤더라. 제주도는 바닷가니까 갈대고, 우리 동네는 뭍이니까 삼대지.

그 초가집 지붕에 받쳐 놓은 삼대를 우린 ‘재릅’이라 했어요. 어른들 몰래, 그 재릅들 가운데 쪽바르고 실한 놈 하나를 쭈욱 뽑아. 뽑아서는 한 발 정도로 잘라. 잘라서는 가는 쪽 끝을 살짝 으깨요. 그러고는 긴 못 하나를 못대가리를 싹둑 잘라. 말이 싹둑이지 말처럼 쉽진 않아요. 펜치로 대가리를 꽉 물고 큰 도끼머리로 내리쳐도 잘릴까 말까. 아뿔싸! 빗맞아 손가락을 치는 날엔 숨을 잘 못 쉴 만큼 아파요. 거멓게 피멍이 들었다가 손톱이 빠지기도 하고. 어쨌든 그렇게 공을 들여 대가리 자른 못을 재릅 끝에 끼워서는 실로 창창 감아서 야물게 묶어요. 그러면 그게 아주 멋진 화살이 돼요. 재릅이 가볍고 야물어서 요즘으로 치면 낚싯대나 자전거 만드는 카본 같은 소재라고나 할까. 대나무를 불에 구워가며 휘어 만든 활에 그 화살을 끼어서 쏘면 한 백 미터는 너끈히 날아가지요.

내 친구가 자기 동생을 담벼락에 꼼짝 말고 서 있으라 하고는, 머리 위에 물바가지를 올려놓고 멀리서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물바가지가 아니라 동생 눈을 맞혔어요. 다행히 눈알을 살짝 빗겨가서 실명은 안 했지만, 저거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지. 활 쏘는 그 장면이 살 떨리게 생생해서 한동안 우리끼리 두고두고 이야깃거리였어요.


아무튼 조선 후기라는 때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시대였어요. 겉으로는 변함없이 조선왕조 계급사회 그대로였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어요. 그 변화는 바로 ‘사람을 보는 눈’이었어요.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양반은 날 때부터 귀한 핏줄로 태어나서 귀하고, 상놈은 날 때부터 천한 피라 개나 돼지처럼 하찮게 여겼지요. 이른바 양반과 상놈, 계급의식이 뚜렷했어요. 그랬는데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그게 무너졌던 거지요. 양반이나 상놈이나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이 귀하다고. 겉으로는 여전히 양반사회였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의식 변화가 움트고 있었던 겁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전기에도 몇몇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은 있었어요. 천민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게 똑같은 생각에서 일으킨 난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런데 후기에 오면 몇몇이 아니라 아주 큰 강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귀하다는 생각. 일부 깨어 있던 양반들도 이 생각을 가졌어요. 이것을 흔히 민중의식, 또는 서민의식이라 해요. 더 정확히 말하면 평등의식이지요.

그러면 왜 이런 의식 변화가 생겼을까요? 오늘 공부의 고갱이가 바로 이거예요. 바로 이 민중의식에서 탄생한 갈래가 사설시조니까.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를 꼽아요. ‘전쟁’과 ‘돈’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큰 전쟁을 치르면서 양반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그 당시 수십, 수백 명씩 보부상이라는 장사꾼을 거느린 상단이 생겨요. 요즘으로 치면 대기업 같은 거지요. 그러면서 뭉칫돈이 굴러다니게 되고, 양반이란 권위보다 돈이 더 중한 세상으로 서서히 바뀌어 간 거지요. 박지원이 쓴 <양반전>을 읽어 보면, 양반을 돈으로 사고팔지요. 그만큼 양반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는 말이지요.

맞아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이 보지 못하고 놓친 게 하나 있어요. 바로 훈민정음, 한글입니다. 나는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이것을 알아요. 예나 지금이나 고급 정보는 입말이 아니라 글말에 담아 책에 저장해요. 고급 정보를 부리는 사람이 바로 특권층이고, 귀족이고, 이른바 기득권층이지요. 그런데 한자한문은 비밀번호를 걸어두지 않아도 되고, 그 책을 아무 데나 던져두더라도 여느 백성들은 접근이 불가능하지요. 어느 누가 그 어려운 한문을 읽어낼 수 있었겠어요. 그러니 한자한문은 양반들 기득권을 지켜주는 아주 좋은 방패막이였던 거지요.

세종 임금이 한글을 만들자 양반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났던 까닭도 거기 있어요. 최만리라는 벼슬아치는 상소문에 대놓고 임금에게 물어요. 전하, 한글을 쓰게 되면 이제 저들이 우리 양반과 맞먹자고 들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또 한자를 버리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이렇게 싸가지없이 물어요.

그런데 세종 임금은 그 무서운 기득권을 누르고 한글 반포 법안을 통과시켰지요. 오늘날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미국 대통령도, 기득권에 막혀 전국민의료보험 법안을 아직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지요. 세종 임금이 참으로 놀랍고도 훌륭하지요. 그런데 불행은 법안을 통과시켜 반포했는데 양반들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무려 500년 동안이나 한자를 고집했다는 거지요. 한글로 된 책은 남녀노소 누구나 그 정보를 골고루 누릴 수 있어요. 한글이야말로 평등 세상의 주춧돌이었던 거지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꼽는다면, 서학을 들 수 있어요. 천주교를 두고 서양에서 왔다고 그 당시는 서학이라 했어요. 조선 시대는 우리 전통 종교인 무교에다, 삼국 시대 때 인도에서 들여온 불교에다,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가 널리 퍼져 있어, 아주 색다른 종교인 천주교는 상식으로 보면 발붙일 틈이 없었을 것 같은데, 실상은 아주 딴판이었어요. 그 낯선 종교 천주교가 왜 그렇게 불 번지듯 번져나갔고, 조선 정부는 왜 그들을 모두 잡아다 죽였을까요?

맞아요.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 때문이었어요. 조선 후기에 싹튼 평등의식과 천주교의 가르침이 아주 딱 맞아떨어졌기에 불 번지듯 번져나갔고, 그게 왕권과 양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생각이었기에 조선 정부는 모두 잡아다 죽였고요. 서학을 짓밟아 싹을 자르자 이번에는 동학이 일어났어요. 우리는 서학과 다르다고 감추었지만, 실상은 같은 뿌리였던 거지요. 동학의 가르침인 ‘인내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이고,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귀하다는 평등사상이었으니까요. 서쪽으로 뿌리를 뻗었다가 모두 잘리니, 이번에는 뿌리를 동쪽으로 뻗어 본 거지요.

동학혁명이 성공할 뻔했어요.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군이 전라도 삼례에서 모여서, 먼저 전주 감영을 접수했어요. 그 기세를 몰아 조선 정부가 있던 서울로 가다가 관군과 일본 군대에 밀려서 우금치 고개까지 후퇴했어요.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가 일본에 군사를 요청했고, 그렇게 해서 달려온 일본 용병들에게 아주 처참하게 무너졌어요. 그때 이미 일본군은 조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 용병이 빌미가 되어 뒷날 나라를 아주 일본 손에 넘겨주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을까 싶어요.

내는 간추려서 거칠게 이야기했지만, 동학 농민전쟁 이야기는 사연이 더 깊고 절절해요. 나는 오래전에 읽은 <녹두장군>이라는 대하소설 가지고 아는 척한 거예요. 기회 닿으면 역사 선생님한테 더 자세히 들어봐요.

우금치는 부여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 고개 둘레 밭을 갈면 사람 뼈마디가 나온다고 들었어요. 얼마나 많은 동학군이 죽었는지 알 만하지요. 우금치 고개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가 50여 차례였고, 그때 죽은 동학군이 2만여 명이었다고 해요. 지금 그 고갯마루에 가면 그때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 넋을 기리는 동학농민군 위령탑이 있어요. 나는 어쩌다 그곳을 지날 때가 있으면, 잠시 그 탑 앞에 고개 숙여 절을 올리고 가요. 이제야 평등 세상이 상식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무서운 생각이었거든요. 평등 세상을 꿈꾸다가 목숨 바친 이름 없는 넋들이, 억울하고 분해서 아직도 울고 있을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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