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독해력’이라 했다가, ‘문해력’이라 하기도 하고, ‘문식력’이라 하기도 하고, 아예 서양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리터러시’라 하기도 한다. 내 보기엔 모두 글을 읽어내는 힘, 곧 ‘읽기힘’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읽기힘’이란 말은 ‘리터러시’가 지닌 뜻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하지 싶다. 그럼 ‘리터리시’가 지닌 뜻을 ‘읽기힘’이란 말에 고스란히 옮겨 담으면 될 일이다. 말이란 게 본디 품이 얼마든지 넓어서 뜻은 담기 나름이다. ‘다리’만 해도 그렇다. 사람이나 짐승 다리이던 것이, 책상다리나 안경다리도 되고, 강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도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도 되고, 물건이 거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문해력’이란 말이 요즘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심심한 사과’ ‘우천시’ ‘중식’ ‘금일’ ‘추후 공고’ 같은 말을 아이나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한자 교육을 해야 하고, 초등 국어 교과서에 한자 섞어 쓰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매듭을 푸는 열쇠는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려운 한자말을 버리고 쉬운 우리 말로 글을 쓰면 된다. ‘잘못해서 볼 낯이 없음’ ‘비 올 때’ ‘점심밥’ ‘오늘’ ‘다시 알림’이라 하면 누구나 알아듣는다. 쉬운 우리 말이 버젓이 있는데도,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글을 써놓고는 못 알아듣는다고 남 탓을 한다.
학자라는 사람들은 이 병이 더욱 깊다. 박사나 석사 학위 논문을 펼쳐보면, 최남선이 썼다는 ‘기미독립선언서’랑 엇비슷하다. 내 말을 못 믿을 것 같아서 한 대목만 옮겨와 본다.
『이러한 내용들을 문학 영역의 특성에 맞게 반영하고, 교실 현장에 적용, 실천 가능하도록 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였다. 총론의 심미적 감성 역량, 국어과의 문화 향유 역량이 국어과에서 충분하게 길러질 수 있게 하는 영역, 그리고 비판적 창의적 사고 역량, 자기 성찰 계발 역량, 공동체 대인 관계 역량 등을 길러주는 교육으로 문학 영역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개정의 방향을 설정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텍스트에 집중했던 기존의 문학교육에 콘텍스트 즉 텍스트를 둘러싼 다양한 요인들을 함께 고려하는 맥락 요인을 명확하게 교육 내용으로 설정함으로써 위에 제시한 역량 및 총론의 과제들을 수행하는 문학교육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박사 논문이,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못 알아듣게 쓴 글이라는 우스갯말이 나왔을까. 이 모양으로 쓴 글이나, 이보다 더 어려운 글이 수능 국어 바탕글로 나온다. 그러고는 아이들더러 읽기힘이 모자란다고 탓한다. 40년 동안 우리 말을 가르친 나도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글이 숱하게 많다.
말과 글이 어려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말을 알아먹는 몇몇 웃대가리(기득권)들만 누리는 세상이 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자 교육을 하면 나아질 것 같은가. 그러면 우리 글은 더욱 어려워져 국한문잡탕체로 탈바꿈할 것이고, 그걸 읽어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뒤로 나앉게 될 것이다.
조선이 한자 한문 때문에 망했다. 다른 세력에게 정권을 넘긴 게 아니라 일본에 나라를 갖다 바쳤다. 헐버트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 후기에 한문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캐보았더니 국민 가운데 2%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시라. 세상의 반인 여자들 지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남자들 가운데 백에 두 사람 지혜로 꾸린 나라가 안 망하고 어떻게 버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