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 여행

by 구자행

한 번에 한 사람씩 다섯 명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과 함께 저녁 먹기로 했다. 미리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련해 두라고 일렀다. 내가 뭘 묻지 않을 거라고. 듣기만 할 거라고. 무슨 이야기든 썰을 풀어 보라고.

오늘 상담하겠다고 신청한 사람은 지민이, 석현이, 아람이, 덕신이, 준성이, 해서 다섯이었는데 덕신이가 몸이 좋지 않아 빠지고 대신 형우가 하기로 했다.

수업 마치고 4시 40분부터 시작했다. 3층 우리 교실에서 가까운 진로활동실을 빌렸다. 아이들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쌓여 있었다.

준○이는 가정사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대만에서 공부하는 형이 있는데, 이 형은 어머니는 같은데 아버지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말하기 쉽지 않은 사생활인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평소엔 괜찮은데 한번 폭발하면 통제가 안 된다고. 초등학교 때 그 불안감 때문에 자기가 심하게 우울증 증세가 왔었다는 이야기. 그때 가면성 우울증 진단받았다고. 지금은 좀 덜 하지만 그래도 그 불안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믿는 종교가 천주교이고 거기서 하는 봉사활동 단체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이야기와 그러면서 힘든 일들을 함께 활동하는 친구 도움으로 이겨냈다고 환한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중학교 때 도서부 하면서 사서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문헌정보교육학과에 가고 싶다고, 꿈을 수줍게 말해 주었다. 다른 대학은 모두 문헌정보과인데 공주대학에만 문헌정보교육학과가 있는데, 꼭 거기 가고 싶다고.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어 고맙다고 하니, 자기 이야기를 들어준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갔다.

지○이는 자기 진로 이야기를 30분 넘게 했다. 자기가 잘하는 게 춤이고, 그래서 중학교 때 내내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동아리장도 했다고. 진학을 수도권 예술고로 가고 싶었는데, 서울 고모집에서 다니기로 하고 학교도 알아보고 일이 착착 진행되다가 막판에 부모님 반대로, 특히 아버지 반대로 무산된 이야기를 풀었다. 지금도 그 아이돌의 꿈을 접진 않았지만, 부모님이 반대하는 일이라 다른 방향을 생각하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석○이는 자기 과거 흑역사를 풀었다. 한 학년이 세 반뿐인 초등학교에서 4학년 들면서 갑자기 전교 찐따 됐다는 이야기. 그 트라우마가 지금도 자기를 괴롭힌다고. 그 때문에 상담 치료와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었다고. 감정 기복이 심해 견디기 어려웠던 이야기와 그 시절에 망상에 빠졌던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했다. 자기가 가벼운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고, 그 사이에 학교가 무너져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수없이 하곤 했다고. 그 악몽이 중학교까지 이어졌고, 고등학교 와서 자퇴를 결심하게 되었다가 최근 심경 변화가 일어난 계기를 한참 이야기했다. 중학교 시절 자기가 찐따가 되어 마음고생할 때, 같이 찐따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주었던 친구를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반장 아○이는 중학교 때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다. 함께 어울리던 친한 친구들이 어느 날 두 패로 갈라졌는데, 자기는 양쪽을 걸치고 있으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와서 반장이 되었을 때 그 트라우마가 되살아날까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 반장이 반 친구들과 소통력이 어찌나 좋은지, 나이 많은 내가 못 미치는 곳을 알뜰하게 채워 주어서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모른다.

다섯 사람 예상 시간이 한 시간 남짓하면 될 줄 알았는데, 네 사람 이야기 듣고 나니 벌써 1시간 30분이 흘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들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마치 취조하듯 이것저것 묻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길 참 잘했구나 싶다.

마지막 대타 형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사직동 돼지국밥집으로 향했다. 형우도 미처 할 이야기를 준비 못 했다며, 미안한 내 마음을 선뜻 받아 주었다, 내 차 뒷자리에 네 명을 앉혀서 형우까지 모두 여섯이 함께 탔다. 가는 내내 아이들 비명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돼지국밥만 먹을 생각이었으나 모두 기분이 좋아 순대도 한 접시 시켰다.

국밥 먹다가 조금 뜬금없이 준○이가 그랬다.

“난 어릴 때 우리 아버지 말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모두 아버지가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어.”

그러자 형○가 냉큼 그 말을 받아 맞장구쳐 주었다.

“맞아! 난 우리 아버지한테도 아버지가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거든.”

형○는 여기 돼지국밥집이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랑 왔던 곳이라 했다. 뜬금없이 말한 게 아니었구나. 국밥 먹다가 어린 시절 아버지랑 국밥 먹던 장면이 떠오른

거구나.

나도 아이들 따라 잠시 동심 세계로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아이들 이름은 본디이름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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