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하는 날, 우리 반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입학식 하는 날 내가 그랬지요. 우리 교실에 들어서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로 웃을 수 있도록 힘써 보겠다고. 어땠나요? 한 학기 동안 웃고 지냈나요?”
“예.”
모두 우렁차게 대꾸해 준다.
그러고 민아와 진우와 나경이를 앞으로 불러내어 교과 우수상을 건넸다. 모두 부러운 눈으로 함께 기뻐해 주고, 또 손뼉까지 쳐 주는데, 1번 동현이가 불쑥 한마디 한다.
“모두 나한테 고마워해라. 다아 내가 깔아 줘서 받는 거니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같이 얼얼하다.
맞는 말이다. 정글에서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을 놓고, 사자 처지에서 보면, 사자가 힘이 세니까 약한 사슴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른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이치라고 하겠지만, 사슴 처지에서 보면, 제아무리 힘센 사자도 사슴을 희생으로 살아가는구나. 맞아, 이 세상은 남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터이다.
이렇게 교과 우수상을 받은 아이들이 이다음에 의사 되고, 판검사 되고 하겠지. 그때 알기나 할까? 내가 안간힘을 쏟아서 된 거니까, 내가 잘나서 된 거니까, 내가 누리는 것은 마땅하다고 여길 테지. 동현이가 깔아 준 덕으로 그만큼 이룬 것을 알기나 할까.
요즘은 아이들과 ‘분배의 공정성’을 놓고 토론해도, 아이들과 자라온 이야기를 쓰거나 시를 써도, 교과서 문학 작품을 읽고 자유토론을 해도, 예전처럼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 내 마음도 식었지만 나보다 아이들 마음이 싸늘하다. 왜일까?
나는 그게 생기부 탓인 듯하다. 아마 내 진단이 틀림없지 싶다. 생기부 기록이 대학 입학을 판가름하면서, 아이들이 교과 세특과 종합 의견과 자율활동과 동아리 활동 기록에 목을 매고 매달린다. 예전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 있던 때보다 경쟁이 한층 더하다. 시험에 수행평가 보태지고, 교과 세특이 보태지고, 종합 의견이 보태졌다. 생기부가 아이들을 꼼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고 말았다.
이 경쟁이 능력주의를 낳았다. 내가 경쟁에서 이겼으니까, 시험에 합격했으니까, 내가 안간힘을 쏟은 결과니까, 나만 누리는 게 마땅하다. 나는 졌으니, 시험에 떨어졌으니, 내가 노력을 남만큼 못 했으니, 백수로 컵밥이나 먹고 고시촌 쪽방에서 지내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인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이란 게 그저 얻은 ‘행운’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맞는 말이다.
어떤 아이들은 이렇게 되물을지 모르겠다.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잘 때, 나는 쉬지 않고 밤잠 안 자고 공부했어요. 그걸 어떻게 행운이라 말해요?’
눈을 조금만 크게 뜨면, 우리가 사는 누리에는 밤잠 안 자고 공부해 볼 기회조차 없는 아이들이 많다. 공부는커녕 먹거리가 없어 굶어 죽는 아이들도 수두룩하다. 단지 내가 태어난 나라와 어버이 잘 만난 행운일 뿐이다.
*아이들 이름은 본디 이름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