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이여, 나와 살 맞대고 가자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을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6』(조선일보 연재, 2008)
제대로 흔들리자
세상은 우리에게 자주 '강해지라'고 요구합니다. 비바람이 불면 뿌리를 꽉 움켜쥐고 버티라고 하고, 상처받지 말라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상처 난 사람에게 '아프지 말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화자는 섣불리 '힘내라'고 말하는 대신 '제대로 흔들리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피하는 법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흔들림은 실패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가 계절을 건너는 자연스러운 춤사위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상처는 끝이 아니다 - 뿌리의 힘
화자는 첫머리에서 ‘상한 갈대’를 말합니다. 갈대는 가뜩이나 약한 존재인데, 여기서는 그마저도 상해 있습니다. 하지만 화자는 동정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 아래서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라며 그 역동성을 긍정합니다. 여기서 흔들림은 무너지는 과정이 아니라, 한 계절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방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밑동’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밑동은 잘려나갈 수 있고, 상처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 깊으면야 /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눈에 보이는 상처가 아무리 깊어도 생을 향한 내면의 뿌리가 살아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이 단호한 말은,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줍니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을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살 맞대고 걷는 결기
여기에서 화자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부평초’ 같은 삶이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완벽해야 꽃이 피는 게 아닙니다. 물이 고이면 부평초도 꽃을 피우듯, 희망은 척박한 조건 속에서도 기어이 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화자는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고통을 등 뒤에 숨기거나 적으로 돌리지 않고, 차라리 ‘살을 맞대고’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무서운 결기입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겠으며,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대수겠습니까. 상황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심이 상황을 압도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은 없다
그렇게 고통과 어깨동무를 하고 걷다 보면, 우리는 ‘고통과 설움의 땅’을 지나 ‘뿌리 깊은 벌판’에 도착하게 됩니다. 물론 그곳에도 여전히 바람은 불 것입니다. 화자는 인생에서 시련 자체가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슬픔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영원할 것’이라는 절망을 부정하는 것. 이것이 이 시가 주는 진짜 위로입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마주잡을 손은 있다
이 긴 여정의 끝, 캄캄한 밤의 끝자락에서 화자는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흔들리며 걸어왔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옵니다. 구원은 나의 의지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타인과의 연대에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고통을 삶의 동력으로 바꾸는 법
이 시는 슬픔을 성급히 떨쳐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갈대처럼, 부평초처럼 충분히 흔들리며 그 파동을 타고 넘으라고 말합니다.
지금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흔들리라고. 그 흔들림 끝에 우리가 마주 잡을 손 하나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