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해설과 감상

- 주소를 얻은 인간, 둥지를 빼앗긴 생명

by 한현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도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5』(조선일보 연재, 2008)



* 산업화의 초기 아직 합법적인 신흥 부유층이 형성되기 어려웠던 1960-70년대에는, 새로운 부자들은 대부분 부패한 재벌,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 군 장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서민들은 그들이 몰려 살던 동빙고동을 도둑촌으로, 여기 등장하는 성북동을 강도촌이라 불렀습니다.



도시 확장의 현장에서

1960년대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 확장이 진행되던 성북동 산자락, 화자는 개발의 소리와 함께 삶의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번지가 새로 생기고 사람이 사는 공간이 넓어지는 변화처럼 보이지만, 그 변화의 그림자 속에는 원래 그곳에 살던 생명이 설 자리를 잃는 상실이 놓여 있습니다. 화자는 보금자리를 잃고 떠도는 비둘기를 끝까지 관찰하며, 자연이 자원으로 바뀌는 과정과 그 속에서 소외되는 생명의 고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합니다.

이 시는 자연 풍경을 노래하는 서정시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문명이 공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방식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문명 비판시입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화자는 ‘주소가 생기는’ 일을 통해 자연이 겪게 된 일을 먼저 말합니다. 산이 행정 질서 속으로 편입되고 주거 공간으로 재편되면서 인간의 생활권은 확장되지만, 정작 그곳을 삶터로 삼아 온 비둘기는 오히려 자기 자리를 잃게 된 것입니다.

새 존재를 등록하고 정리하는 문명의 방식이 인간에게는 편리를 주지만, 기존의 생명에게는 추방으로 작동한다는 역설이 드러납니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여기서 개발은 소리로 현실화됩니다. 돌을 깨고 산을 흔드는 소음은 자연을 삶의 터전이 아니라 채굴·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문명의 폭력성을 상징합니다. 비둘기가 그 소리에 떨고, 마침내 내면에 금이 간 듯 묘사되는 부분은, 상실이 단순한 이동이나 불편이 아니라 존재의 심층을 손상시키는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개발의 포성은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의 평화까지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비둘기의 본성을 제시합니다. 비둘기는 맑은 아침 하늘을 한 바퀴 돌며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려는 몸짓을 보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인간의 개발 논리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본래의 질서이고, 비둘기의 비행은 평화가 아직 이념의 차원에서는 사라지지 않았음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둘기의 이 평화는 내려앉아 깃들 삶터를 잃은 채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이미 위태롭습니다



성북도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시선은 다시 땅으로 내려오며, 비둘기의 삶이 얼마나 왜소해졌는지가 구체화됩니다.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먹이 하나 집어 먹을 넉넉한 마당조차 없고, 어디를 가도 폭발음이 메아리칩니다. 공간의 결핍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살 수 없음’의 상태입니다. 이 장면은 개발이 자연을 훼손하는 수준을 넘어, 생명의 일상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힘임을 보여줍니다.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비둘기는 ‘피난’하듯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이때 비둘기는 자연의 새라기보다 삶터를 잃은 난민의 형상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생활 흔적에서 옛 온기를 떠올리며 잠시 향수를 느끼지만, 그 위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결국 비둘기는 다시 채굴 현장으로 밀려가 갓 깎인 돌의 온기 같은 임시적 따뜻함에 기대어 연명합니다. 문명이 만들어 낸 공간에서 생명이 얻는 따뜻함이 얼마나 초라하고 일시적인지, 그리고 그 생존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이 대목이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이제 화자는 과거의 비둘기와 현재의 비둘기를 대비시키며, 상실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결론을 내립니다.

예전의 비둘기는 인간을 믿고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가며 사랑과 평화를 나누던 존재였으나, 이제는 산도 잃고 인간과의 관계도 잃은 채 쫓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사랑과 평화라는 가치가 더 이상 삶 속에서 생산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비둘기의 변질이 아니라, 문명화된 인간 사회가 공존의 감각과 윤리를 잃어버린 결과이고, 관념으로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가치들이 삶터를 잃는 순간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보여 주는 비판적 통찰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개발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제시하면서도, 그 배후에 작동하는 인간 중심 문명의 논리를 비판하는 문명 비판적 리얼리즘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단순히 자연 파괴에 대한 고발에 그치지 않고, 삶터를 잃은 생명이 어떻게 소외되고, 그 소외가 결국 인간 사회가 믿어 온 사랑과 평화의 기반까지 허물어뜨리는지를 한 마리 비둘기의 추방과 방황으로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공존은 구호가 아니라 자리를 함께 마련하는 일이며, 그 자리를 잃은 순간 사랑과 평화는 말로만 남기 쉽다는 사실을 이 시는 묵직하게 증언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근대화의 그늘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아직도 유효한 문명 비판의 질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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