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시조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어 학처럼만 여위느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6』(조선일보 연재, 2008)
가야금으로 형상화된 조국
이 작품은 전통 정형시인 시조의 틀을 바탕으로 하되, 오늘날의 역사적 현실과 감각을 밀도 있게 끌어안은 현대 시조입니다. 시조는 짧은 형식 안에서 정서를 급격히 고조시키고, 마지막에 응축된 결구로 의미를 맺어야 하는 장르입니다. 이 작품은 그 장르적 압축을 활용해 ‘조국’이라는 자칫 관념적으로 굳어질 수 있는 주제를, 가야금이라는 구체적 사물과 연주 행위로 형상화하여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듭니다.
화자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루만지는 대상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수난을 겪어 온 조국의 상징입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거대한 상처를 통과해 온 조국을 앞에 두고, 연주자는 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그것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안아 듭니다.
이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우리는 작품을 이해할 실마리를 얻습니다. 조국은 힘껏 외쳐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생명처럼 다루어야 할 대상이며, 연주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손끝에 새겨진 사랑, 울림으로 터져 나오는 비애
첫 연은 가야금 곧 조국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를 ‘손’의 감각으로 보여줍니다. 화자는 대상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긴장과 떨림을 동반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의 떨림은 단순한 연주 동작이 아니라, 조국의 상처를 떠올리며 몸이 반응하는 징후입니다. 손끝이 줄을 건드리는 즉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음악적 울림을 넘어, 억눌러 두었던 비애가 밖으로 번져 나오는 통로가 됩니다.
이 연에서 가야금은 ‘연주되는 대상’이 아니라, 조국의 아픔을 함께 겪는 존재가 되고, 연주는 기술이 아니라 정서의 고백이 됩니다. 짧은 시조를 도입하여 이미 시작에서 사랑과 고통의 결합을 확정해 둔 점이 이 작품의 강한 응축력을 보여줍니다.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울림의 확장, 삶의 터전과 자연까지 흔드는 조국의 정서
두 번째 연은 소리의 울림이 개인의 내면을 넘어 공동의 풍경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가야금 가락이 퍼지자 소박한 삶의 공간과 달빛의 정경이 함께 떠오르는데, 이는 ‘조국’이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생활의 자리라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또한 화자의 목이 메는 순간 자연의 작은 움직임까지 함께 떨리는 모습은, 조국의 슬픔이 한 개인의 사연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스며 있는 정서임을 드러냅니다. 여기에 눈물과 흰옷의 이미지는 우리 민족이 지켜 온 생활의 결, 그리고 역사적 시련 속에서도 버텨 온 존재 방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연에서 조국은 설명이 아니라, 소리와 풍경으로 체험되는 세계가 됩니다.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어 학처럼만 여위느냐.
침묵을 향한 호소, 여위는 청산과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랑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슬픔은 극한에 닿습니다. 통곡조차 다 쏟아내지 못할 만큼 큰 비애는 하늘의 상처로까지 확대되어 제시되고, 그 무게는 조국의 비극이 개인의 감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절망으로 꺾이지 않습니다. 악기의 여러 줄에 맺힌 굴곡진 정서는 역사처럼 굽이치며 이어지고, 그 굽이침은 곧 애정의 깊이로 전환됩니다.
이어지는 산천을 향한 호소는 대답을 기대해서라기보다, 침묵 속에서도 관계를 끊지 않으려는 마지막 의지에 가깝습니다. 말없이 여위어 가는 청산의 형상은 수난 속에서 쇠잔해진 조국의 모습이며, 화자는 그 쇠잔함 앞에서 끝내 사랑을 거두지 않습니다.
현대 시조 특유의 종장 결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애를 애정의 다짐으로 전환하며 작품의 정서를 단단히 매듭짓습니다.
전통의 격조와 근현대사 상흔의 조화
이 작품은 시조라는 전통 형식의 압축과 결구의 힘을 바탕으로 ‘조국’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관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시인은 직접적인 주장이나 설명 대신 가야금과 연주 행위를 전면에 세워, 손끝의 떨림에서 공동의 풍경, 그리고 침묵을 향한 호소로 정서를 단계적으로 끌어올립니다. 그 과정에서 민족적 비애는 단순한 체념으로 닫히지 않고, 상처를 어루만지고 끝까지 말을 건네는 태도 속에서 사랑의 지속 방식으로 새롭게 의미화됩니다.
또한 이 작품은 현대 시조가 전통의 격조를 유지하면서도 근현대사의 상흔을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짧은 형식 속에 역사적 고통과 서정적 아름다움을 함께 담아, ‘한’의 정서를 울림으로 승화시키는 방식은 한국 현대 시조가 도달한 높은 성취를 증명합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