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해설과 감상

- 버드나무가 크게 자라 가지가 담을 넘다!

by 한현수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더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4』(조선일보 연재, 2008)



담장 앞에서 시작된 생명력의 성찰

이 시의 화자는 담장을 넘어 뻗어 가는 수양버들 가지를 바라보며, 단순한 식물의 생장 현상 이상을 읽어 냅니다. 그는 가지 하나의 움직임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힘들과, 그 가지를 담 너머로 밀어 올린 조건들을 함께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담을 넘는 한 가지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한 존재의 넘어섬이 결코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 삶에서 장애물로 여겨지는 담이 때로는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일깨워 줍니다.

이 시를 이해하는 핵심은 넘어섬의 주체를 가지 하나로 한정하지 않고, 그 배후에 있는 연대와 시련, 그리고 경계의 역설까지 함께 보는 데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조력자들의 연대

수양버들 가지가 담을 넘는 순간은 겉으로 보면 가지 하나의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이 가지만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땅속에서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채 가지를 떠받치는 뿌리, 잠시 몸을 붙였다가 적막하게 떠나는 꽃과 잎이 함께 믿어 주지 않았다면, 가지는 혼자 떨기만 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눈에 보이는 성취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협력과 지지가 놓여 있음을 말합니다. 결국 담을 넘는 가지는 홀로 솟아오른 존재가 아니라, 많은 부분들의 보이지 않는 연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해진 존재입니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더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시련의 역설과 담의 재해석

이어 화자는 며칠 동안 내리는 비와 밤새 쌓이는 폭설을 떠올립니다. 얼핏 보면 비와 눈은 가지를 괴롭히고 짓누르는 조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 속에서는 바로 그러한 압박과 하중이 가지를 담 너머로 기울게 하고, 결과적으로 넘어섬의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담의 의미입니다. 담은 가지의 마음을 머뭇거리게 하고 바깥세계를 막아 두는 금단의 경계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담이 있었기에 가지는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정수리를 타 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담은 단순히 막는 벽이 아니라, 넘어섬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시는 장애물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역설적 존재로 다시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도박이자 도반으로서의 담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수양버들에만 머물지 않고 목련 가지, 감나무 가지, 줄장미 줄기, 담쟁이 줄기까지 시선을 넓힙니다. 이는 담을 넘는 일이 특정한 한 식물의 일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야 하는 모든 존재의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이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존재입니다. 이름 없이 머물던 존재가 담과 맞서고 그것을 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기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담은 한편으로는 실패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도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를 더 넓은 자리로 이끄는 도반(함께 도를 닦는 벗)이기도 합니다.

화자는 이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삶의 한계와 마주하는 일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열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한계를 넘어서는 모든 존재를 향한 통찰

이 시는 한 존재의 성취를 개인의 힘으로만 돌리지 않고, 그 뒤에 놓인 관계의 힘과 시련의 의미를 함께 사유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담을 단순한 억압이나 절망의 상징으로 그리지 않고, 넘어섬을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식물의 생장에 대한 관찰을 넘어, 인간의 삶에서도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시가 됩니다.

결국 이 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어떤 도약도 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를 가로막는 경계조차 때로는 우리를 더 멀리 나아가게 하는 뜻밖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평 노트]

이 시는 수양버들의 구체적 생태를 새롭게 발견한 작품이라기보다, 일반적인 자연 현상에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원리를 얹은 작품입니다. 여기서 자연은 독립적인 존재와 논리로 살아 움직이기보다, 연대·시련·도약의 원리를 드러내는 매개로 기능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조정권의 '산정 묘지1',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김승희 '솟구쳐 오르기 2'와 더불어 내가 '교시(교훈)형 서정'이라 부르는 작품군에 속할 듯합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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