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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빈집' 해설과 감상

- 박제된 실연(失戀)

by 느티나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어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랑을 떠나보낸 집은 집이 아니다. 빈집이고 빈 몸이고 빈 마음이다. 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문을 잠근다'는 것은, '내 사랑'으로 지칭되는 소중한 것들을 가둔다는 것이고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잠금이자 감금일 것이다. 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 '빈집'에 다름 아니고 그 빈집이 관(棺)을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삶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사랑이기에, 사랑의 상실은 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나직이 되뇌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하나씩 불러낸 후 그것들을 떠나보낼 때, 부름의 언어로 발설되었던 그 실연(失戀)의 언어는 시인의 너무 이른 죽음으로 실연(實演)되었던가. - 정끝별, '시사랑 숨비소리' -



화자는 사랑을 잃고 글을 씁니다. 그 사랑과 관계된 모든 사물들, 기억들과 이별하고(잘 있어라) 집을 잠가 버립니다(문을 잠그네). 이 시의 제재는 '사랑의 상실'입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화자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쓴다고 합니다.

여기서 '쓴다'는 말은, '나는 이제 내 실연에 대해 쓰겠다.'는 식의 머리말이 아닙니다. 두 번째 연의 뒷부분을 보면, 화자는 사랑을 잃기 전에는, '공포'와 '망설임'으로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는, '사랑을 잃고서야 비로소 나는 쓴다.'로 이해해야 할 듯합니다.


잘 있어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화자는 사랑과 관련된 사물들과 이제 이별합니다.

사랑의 그리움으로 뒤척이다 새웠던 밤들, 안정을 얻지 못해 서성이던 겨울밤 창밖으로 흐르던 안개들, 쓸 수 없어 흰 종이를 앞에 놓고 그냥 앉아 있던 책상 위를 무심히 비추던 촛불들은, 사랑이 사라진 이제부터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잘 있어라'가 앞뒤의 프레임이 되어 하나로 묶인 이것들은, 사랑의 시간을 화자와 함께 했던 사물들입니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앞에서 '사랑의 시간에는 화자가 쓰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화자는 쓰기 위해 흰 종이 앞에 앉았지만, '공포'로 쓰지 못했습니다. '망설이며' 눈물만 흘렸습니다. 아마 거절과 외면이 두려웠나 봅니다.

그리고 이 '공포, 망설임'의 두 구절은 다시 '잘 있거라'라는 프레임에 의해, '열망'으로 정리됩니다. '공포'와 '망설임'은 그만큼 사랑을 가지고 싶었던 열망이 컸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지금, 이 열망은 이제 나와 아무 관련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결핍감, 절망적 무력감과 방황(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속에서(아마 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화자는 사랑을 담고 있었던 빈집의 문을 잠급니다. 그렇게 화자의 '가엾은 사랑'은 '빈 집에 갇히'게 됩니다.



* 화자는 사랑의 시간에는 사랑을 쓰지 못합니다. 사랑을 상실하고 비로소 씁니다. 상실 후에 쓰는 글이니, 그 글은 상실의 글, 실연의 글입니다. 글로 쓰면 그 안에 담긴 것들은 고착됩니다. 살아 있는 사랑을 쓰면 살아 있는 사랑의 모습이 남고, 잃어버린 사랑을 쓰면 잃어버린 사랑의 모습이 남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상실한 사랑만을 써서 남깁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애완동물의 사진을 찍어 남기거나 박제로 만들어 보관하는 일과 같습니다. 상실의 순간, 부재의 순간이 고착되는 것입니다.


화자는 사랑의 시간을 함께 했던 사물들, 열망들이 사라진 집을 없애 버리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두고 문을 잠가 버릴 뿐입니다.

상실과 부재의 현장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주검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하는 일과 같습니다. 죽음, 부재의 모습은 고착됩니다.


화자는 흐르는 밤, 떠도는 안개, 흔들리는 촛불, 공포와 망설임의 열망과 같이 움직이는 것, 살아 있는 것, 충만한 것들이 사라지고, 상실, 부재가 그 자리를 채웠을 때 비로소 카메라를 대고 셔터를 누릅니다. 마치 이것이 내가 아는 세상의 본모습이라는 듯이.


아주 오래전에 아내에게 들었던 얘기입니다.

심한 폭우가 몰아친 후,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아버지의 묘가 걱정되었던 남자가 아내와 함께 묘지를 찾습니다. 묘는 폭우에 휩쓸렸고 아버지의 유골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본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 내려갔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남자는 아내를 따라가 다시 데리고 올라옵니다. 그리고 아내의 얼굴을 묘쪽으로 돌리게 한 후 단호하게 말합니다.

"똑바로 보고 잘 기억해 둬. 이게 아버지의 모습이야!"

인간 실체의 한 모습, 인생의 당연한 귀결을 아내에게 각인시켜, 아내의 트라우마를 막아 보려는 남편의 노력이었을 것입니다.


화자는 인생은 상실과 부재, 고독이 본모습임을 깨달았나 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진으로, 박제로 고착시키듯이, '씀'으로써 새겨 두려고 했을 것입니다. 미이라로 보관하듯이, '잠금'으로써 열망을 단속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슬픈 운명에서 자기를 지켜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의 남편이 아내를 트라우마에서 지켜내고 싶었던 것처럼.


* 그런데 잘 읽어 보면 이 작품에는 객관화의 의지를 가진 화자의 시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자는 ‘나는 쓰네, 문을 잠그네, 빈집에 갇혔네'처럼 '-네’라는 어미를 반복해, 마치 유체이탈한 영혼이 자신을 내려다보듯 자신을 객관화시킵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장치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엾은'이라는 한 단어가 이 객관화의 포장을 가볍게 파열시킵니다. 감추려 했던 연민이 새어 나오며, 박제된 상실의 표면에 눈물의 흔적이 번집니다. 상처 입은 화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관찰하는 화자의 시점과, 3연의 '가엾은'에서 드러나는 상처 입은 화자의 시점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김현의 말처럼 '더 이상 부정적일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인간적 울림이 깊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 1연의 '쓰네'와 3연의 '문을 잠그네'는 내포적 의미는 비슷하지만, 이미지는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연의 '쓰네'는 2연 뒷부분의 '쓰는'일과, 3연의 '문을 잠그네'는 2연 앞부분 방의 정경과 연결되고, 다시 2연 전체는 사랑의 기억으로 묶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적 짜임새가 완성됩니다.

이런 면에서도 좋은 시, 훌륭한 시인의 능력이 느껴집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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