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서도 드러내지 못할 사랑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 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 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러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꺼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이 작품은 전통적 주제인 이별의 정한, 승화된 체념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쓰여진 어떤 시보다도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시를 또 다른 이별의 시와 구별하게 해주는 특색은 교감(交感)에 있다. 곧,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저승의 그 사람과 감나무를 사이에 두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가 저승에 있는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가지를 밀어 열매를 맺으면, 저승의 그 사람이 '그 열매 빛깔이/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주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을 노래한 시이다.
결국, 이 시는 상투성에 떨어지기 쉬운 주제를 감나무라는 상징적 매개물을 통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전통적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한 작품이다.
-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화자는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깊은 사랑을 참고 감추고 견디며 살고 있습니다. 시대적 굴레 때문인지, 두려움이나 열등감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사랑을 나누기는커녕 전하지도 못한 채 가슴에 묻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 사랑이 저승에서나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승에서 불가능했던 일이 저승이라고 해서 곧바로 가능해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화자의 사랑은 점점 '한'으로 굳어져 갑니다.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 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화자는 자신을 감나무로, 자신의 사랑을 열매에 비유합니다. 감은 오래 속으로 익는 열매입니다. 그의 사랑도 그렇게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숙성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전할 길이 없어 그대로 붉게 물들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 열매는 '서러운 노을빛'이 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 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러질까 본데,
'이것이(사랑의 가지가)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는 없다'는 말은, '지금-여기(이승)'에서는 화자가 그 사람에게 다가갈 방법도 용기도 여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 세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을까 하고, 화자와 그 사람이 저승에 갔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는 것(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입니다.
그러나 이승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불가능했던 일이 저승이라고 해서 돌연 가능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껏 가시 범위까지는 다가서더라도, 여전히 정면으로 마주 설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 사람의 눈길을 비껴선 자리에서나(등 뒤나 머리 위에) 머물 뿐입니다. '~ㄹ까 본데'라는 어미에서 그런 회피와 망설임이 드러납니다. 화자는 죽은 뒤 최후의 기회에서조차(마지막으로)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주변만 맴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꺼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3연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연에서 보여준 화자의 회피와 망설임과는 다른 의외의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기대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화자는 저승에서의 자신이 어쩌면 그 사람에게 '느꺼운'(뿌듯한) 존재(안마당에 심고 싶던)가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봅니다. 또,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삶 전체가 그 사람만을 향해 있었다(전 설움, 전 소망)는 사실을 그 사람이 알아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도 살아가는 동안 화자를 그리워하며 서럽게 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화자의 소망이 담긴 추측일 뿐입니다. 소망이 담긴 추측을 단정으로 바꾸기에는 화자에게 너무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몰라'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랑은 저승에서도 지금처럼 말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감나무 가지, 열매는 말하지 못한 사랑의 방식을 상징합니다. 1연의 열매가 화자의 사랑이었다면, 3연의 '느꺼운 열매’는 그 사랑이 도달해 화자 자신이 ‘그 사람이 바라던 반려’로 변하길 바라는 소망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하지만 저승에서의 비껴선 자리(등 뒤, 머리 위), 그리고 가정법과 ‘몰라’의 반복은, 이 사랑이 이승에서뿐만 아니라 사후의 상상 속에서도 끝내 정면 고백으로 완결되지 못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사건이 아닌 소통되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한'의 정서가 되는 것입니다.
* 이 시를 흔히 위에 소개한 글처럼 '화자가 저승의 그 사람과 감나무를 사이에 두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고 해설하지만, 이는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3연을 보면 소망 섞인 추측(~될는지도 몰라, 알아낼는지도 몰라)만 있을 뿐, 상대의 응답이나 확인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교감은 없습니다.
더구나 3연의 화자는 미래의 저승을 상상하면서 ‘전생’을 말합니다. 이는 발화 시점의 현재가 이승임을 전제하고, 3연이 죽은 이후의 가정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연의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는 없고'는 '지금-여기(이승)'에서는 사랑을 제대로 전할 길이 없어서, 저승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는 뜻이지, '현재 저승에 있는 그 사람과 소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결국 이 시에서 화자와 ‘그 사람’은 둘 다 이승에 살아 있는 사람이고, 이 시는 교감의 성취가 아니라 교감의 유예와 부재(사랑이 전해지지 못함)로 인해 끝내 ‘한’으로 굳어지는 사랑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