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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감나무 그늘 아래' 해설과 감상

- 이별 후에 오는 것

by 느티나무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따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설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소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 그리움 날로 자라면

주먹 송이처럼 커 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 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 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웬 것이랴만,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 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 보게.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화자는 사랑이 끝난 뒤 마음이 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헤어졌으면 끝나야 하고, 잊혀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속 그리움은 감나무처럼 가지를 뻗고, 그늘을 드리우고, 시간이 지날수록 열매를 키워 갑니다.

화자는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는 자신을 어이없어 하면서도, 결국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마주 보기로 결심합니다. 자신 안의 슬픔과 기다림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견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따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설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마음을 흔들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

화자는 자신을 감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바람처럼 마음을 흔들고 가는 사건들(바람), 햇살처럼 따뜻한 기억을 남기고 가는 순간들(햇살)만이 아닙니다. 오색딱따구리처럼 작은 충격을 남기고 가는 인연들, 청솔모처럼 짧게 왔다가 마음을 흔들고 빠르게 사라지는 인연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사랑이 끝났지만 아직도 마음이 완전히 비워지지 않고, 남은 기억의 조각들이 아직 감나무 위를 오가며 가지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끝났기로소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 그리움 날로 자라면

주먹 송이처럼 커 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 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 보게.


그리움이 자라며 익어 가는 시간

그렇게 화자에게는 사랑이 끝나도 그리움은 남아 있습니다. 화자는 자기 내면의 이 그리움을 땡감으로 비유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직 덜 익은 채로 단단하고 크게 자랄 것이라고 합니다..
잠깐씩 스치는 밝은 기억들(흰 구름), 길게 내리칠 아픔과 슬픔의 시간들(장대비)을 보내면서, 이 그리움은 화자의 내면에서 천천히 성숙해 갈 것입니다.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웬 것이랴만,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 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 보게.


그리움의 그늘

화자가 '감나무'라면, ‘감나무 그늘’은 곧 화자의 마음속 그리움이 드리운 내면의 공간일 것입니다. 화자는 그 그늘 아래 평상을 놓습니다. 이별 후에 찾아오는 기다림이 어이없는 일인 줄 알지만,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움 속에서 화자는 고독의 시간과 자연의 리듬(밤, 산이 우는 소리, 새벽, 계곡 물소리)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려고 합니다. 화자의 고통이 내면화되어 깊어지면서, 감정이 성숙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기다림, 서러움의 밝은 열매

이별의 고통(짙푸른 감들)은 견디기 어렵지만 그 끝은 결국 있습니다. 보통 그 끝은 남에 대한 따뜻한 이해, 그리고 삶에 대한 통찰(익은 감)입니다. 그래서 그리움과 기다림, 고통과 슬픔은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빛(형형 등불)이 됩니다.

그리움이 그늘 속에서 숙성될 때, 그리움은 더 이상 화자를 짓누르지 않고 오히려 삶을 밝히는 내면의 새로운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은 이별 뒤에 남은 그리움을 감나무와 감의 성장에 빗대어, 슬픔이 어떻게 성숙을 거쳐 빛으로 바뀌는지 보여주는 시입니다.

감나무, 땡감, 바람과 햇빛, 흰 구름과 장대비, 딱다구리와 청설모, 그늘과 평상 등 자연 이미지들을 화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쓰고 있고, 독자는 이 이미지들을 통해 화자의 흔들림과 기다림, 서러움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화자는 그리움을 지우려 하지 않고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듯 곁에 두고 견디면서, 그 감정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고 따뜻하게 바라보게 하는 내면의 등불로 변해 가는 과정을 받아들입니다. '형형 등불',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라는 시구는, 바로 그 익은 그리움이 삶을 밝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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