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즐기는 일본 여행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사람들로부터

by 샌디


백수 3주 차.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경험해 보고, 미뤄뒀던 만남도 어느 정도 해치우자 조금 심심해질 무렵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 이직에 성공한 전 회사 동료 M이 일본으로 꽤나 긴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출장인데 숙소 공간이 남아. 놀러 올래?"


그런데 이게 웬 걸, 일본으로 여행을 오면 숙소를 공짜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악명 높은 더위 탓에 다들 기피하는 '여름의 일본'이어서 그런지, 비행기 표도 꽤나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그렇게 긴축 재정 단계에 돌입해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급하게 도쿄행 티켓을 끊었다.




출국 당일 아침, 나는 해외로 혼자 떠나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99% P의 무계획 인간 그 자체인 나는, 숙소까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간다면 혼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한 편으론 걱정과 긴장을 하기도 하였다.

도쿄에 도착한 저녁, 친구 M은 나에게 숙소의 주소를 공유해 주곤 사전에 예정돼 있던 지인들과의 약속 장소에 나가 있었다. (우리는 약 5일간, 이러한 패턴으로 서로의 목적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M은 낮 동안 오피스 출근을 하였고, 저녁엔 미리 약속된 만남을 갖기도 하였으며, 나는 낮 동안 혼자 할 수 있는 자유 여행을 즐겼다. 그리고 각자의 일정을 마치고 만난 늦은 저녁엔 맛있는 음식과 술 한잔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잠에 들었다.)

구글맵을 보며 혼자 짐 챙기랴- 길 찾으랴- 피로에 절여져 있었지만, 숙소 바로 앞 역을 나오면 보이는 아름답고 화려한 뷰에 나의 컨디션은 다행히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역을 바로 나오면 보이는 뷰 (도쿄 타워)


나는 서둘러 올라가 짐을 내려놓곤, 재빠르게 다시 내려와 밤공기를 즐기기 위해 거리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염려했던 날씨와 다르게 제법 선선한 도쿄의 거리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저곳에 서서 각자의 사진을 찍고 있었고, 연인, 친구, 가족, 서로가 서로를 웃으며 찍어주는 모습을 보며 괜스레 미소를 띤 채 도쿄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후에 어떤 서양인 여성 두 분이 한국말로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라고 부탁을 하셨는데 그게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 일본에서 서양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다니 말이야.)


그렇게 동네 구경을 하며 간단한 저녁거리를 편의점에서 사 와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있을 무렵, 친구 M이 약속을 마치고 돌아와선, 나가서 가볍게 한 잔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이때부터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재밌는 경험을 하나씩 쌓아가기 시작했다.

따로 또 같이, 그리고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사람들로부터를 다시 한번 느꼈던 순간들을 정리해 보았다.




1. 스탠딩 비어바에서 만난 Y

여행 첫날.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어느 작은 스탠딩 비어바엔 정겨운 공간에 서서 서로 얘기를 나누며 맥주 한 잔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서로 스몰톡을 나누며 친해지는 가게 분위기. 하지만 여기에서의 나는 그야말로 '이방인'이었다. 보통 유명한 관광지만 찾았던 나에게, 한국인 하나 없는 로컬 식당이라는 건 너무나 새로운 경험이었으니까. 아무도 나의 언어를 모른다는 건, 편안함과 동시에 답답함과 낯섦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친구 M에게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묻기도, 우리의 미뤄뒀던 근황 토크를 하기도 하던 찰나, 옆에 서 있던 한 여성분이 M에게 말을 거셨다.

"본인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한국인이시래. 우리가 한국말하는 걸 듣고 말을 거신 것 같아."

그 흔한 영어 메뉴판도 없는 로컬 스탠딩 비어바

그녀의 이름은 Y.

30대 후반정도로 보이던 그녀는 48세의 회사원이었고, 이 스탠딩 비어바의 단골이었다.

"둘이 얘기하는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해."라고 얘기하는 Y에게, 우리는 손사래를 쳤다.

다만, Y는 영어에 유창하지 못했고, 나는 일본어에 유창하지 못했기에, M이 모든 대화를 거의 동시통역에 가깝게 해 줘야 서로 간의 소통이 가능했다. 반대로, 관광객이라기엔 현지인급의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M에게 그녀는 신기함을 표했고, (그도 그럴 게 M은 일본 비즈니스팀이기 때문에) 그녀는 우리의 관계(회사 동료)와 나이를 듣더니 귀엽다며 한껏 다정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곤, 일본의 특이한 로컬 병맥주를 하나 사서 글라스에 나눠주었다.


M이 중간중간 자리를 비울 때면 Y와 나는 서로의 대화를 어떻게든 알아듣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밝고 귀여운 에너지의 그녀는 일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위해 바디랭귀지와 짧은 영단어를 구사하였고, 나는 일본어 통역기와 듀오링고를 통해 배운 표현 몇 개를 사용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의 번역기 기록 (...)


"선주짱, 한국에서 인기가 많게 생겼어. 남자친구가 있는 거야?"

"오, 감사해요! 저는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어요."

"대단해, 그동안 다른 남자가 대시한 적은 없었어? 그렇게 오래 만날 수 있게 하는 남자친구의 매력이 뭐야? 사진 보고 싶어!"


후엔 그녀의 연애 고민 상담(?)도 해주며 꽤나 긴 시간 이야길 나누고 헤어질 무렵, 마지막으로 그녀의 폭탄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너희 너무 맘에 든다. 나중에 같이 걸스바도 가보고 싶어!"




2. 골든가이에서 만난 M의 친구 A

여행 둘째 날. 마당발인 친구 M은 신주쿠에 있는 골목 술집에 많은 친구를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분위기가 좋다는 스탠딩 바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맥주 한 잔씩을 손에 든 채, 겨우 제 공간 조금을 확보하고 서 있는 사람들 수십 명을 볼 수 있었다. (과격한 표현이지만, 정말 닭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사람이 정말 빽빽하다

그 좁은 공간을 비집고 우리도 겨우 자리를 잡고 서 이 바의 시그니처라는 레몬 사와를 하나씩 시켰을 무렵, 친구 M이 바로 옆에 있던 남자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는 같은 골목 안 다른 단골바의 바텐더 A였다.


A는 홍콩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랐으며, 현재는 일본에서 생활 중인 그야말로 글로벌한 경험의 친구였다.

내 소개를 마치자, "그럼 일본어보다 영어가 편해?"라고 물은 그는, M과의 대화에선 일본어를, 나와의 대화에선 영어를 구사하며 서로의 대화를 배려해 주었다. (멋진 애티튜드를 갖고 있는 그의 나이는 놀랍게도 나와 동갑이었으며, 심지어 쓰리잡을 갖고 있는 진정한 워커홀릭이었다.)


A는 필름 카메라 케이스를 목에 걸고 있었다. 카메라를 좋아하는 내가 "Can I see?"라고 묻자, "Sure."이라며 그는 카메라를 내게 넘겨주었고, 사용법을 알려주며 나를 찍어주기도 하였다.


"난 카메라가 4대인데 이거랑 똑같은 카메라가 하나 더 있어. 실수로 망가뜨렸는데 이 카메라를 정말 좋아해서 똑같은 걸 하나 더 구했어."

"처음 보는 브랜드야. 이 카메라가 왜 좋아?"

"셔터 빼고는 거추장스러운 게 아무것도 없잖아."


A의 말대로 난생처음 보는 그의 카메라엔 어떠한 거추장스러운 조작 버튼이나 디자인이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플래시조차도.(어두운 공간에서 찍으면 그대로 어둡게 나오는 것도 이 카메라의 매력이란다.) 대화를 나눌수록 괴짜 같기도, 예술가 같기도 한 그는, 작년 겨울엔 한국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보러 방문했을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문화인이었다.


그에게 도쿄 여행에서 제일 먹고 싶은 음식으로 몬자야키를 꼽아 말하자, 그는 "Seriously..?"라고 난색을 표하며, 나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로 몬자야키가 별로인 이유 10가지를 대기도 하였지만, 혹시 추천해 줄 몬자야키집이 있냐고 묻는 질문엔, 잠깐만 기다리라며 성심성의껏 맛집을 골라 추천해 주는 상냥함을 지니고 있었다.


여행을 끝마칠 때쯤 그의 카메라 기종을 떠올리고 싶었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쓰기에 가장 어울리는 카메라이니 궁금증은 저 멀리 넣어둬야지. 그리고 아마 그의 카메라에 남은 영원히 받지 못할 내 사진도.

GPT와 카메라 맞추기 스무고개. 하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3. 이치란 라멘에서 만난 중국인 관광객들

여행 셋째 날. 혼자 오모테산도를 돌다가 몇 년 전 처음 일본에 왔을 때 먹었던 이치란 라멘이 문득 먹고 싶어졌다. 바로 향한 가장 가까운 지점은 여행 비수기의 평일 낮이라 그런지 다행히 웨이팅이 길지 않았고, 서두를 것 없는 혼여행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줄을 서기로 하였다.

(웨이팅은 내 앞에 먼저 온 중국인 관광객이 조금, 그 뒤로 줄을 선 내 뒤로 곧이어 다른 중국인 관광객 무리가 선 정도였다. 물론 덕분에 나는 20명 정도 되는 중국인 사이에 낀 한국인 1명이 되긴 하였다.)


이치란은 식당에 들어가기 전, 가게 밖에 비치된 자판기를 이용해 원하는 메뉴의 표를 미리 결제하여 발권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내 차례가 다가와 자판기 앞에 서 라멘을 누르고 발권을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아무리 기다려도 표가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버튼을 눌렀지만 자판기 디스플레이엔 일본어가 나올 뿐, 여전히 표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던 내가 우왕좌왕하며 실시간 번역기를 꺼내 들려던 찰나, 날 계속 바라보고 있던 어떤 아저씨가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거셨다. 그런데 그러자 내 뒤에 계시던 아주머니도, 그 옆에 다른 분도... 전부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사방팔방 들리는 중국어에 당황한 내 표정을 아저씨가 읽으셨는지, 아저씨는 머뭇대시다가 영어로 말을 거셨다.


"... not Chinese?"

"Sorry, I'm a Korean."

"Ah, Sorry. Money, first"


다행히 나는 "아!"라고 깨달으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발권에 성공하였고, 아저씨는 나에게 웃으며 "Egg. Egg. Best." (계란이 제일 맛있어.)라는 말과 함께 엄지 척 하나를 날려주셨다.


"This ramen. good." (여기 라멘 맛있어.)


발권을 하고 자리로 불려 들어가기까진 꽤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뽑은 표를 갖고 대기 의자에 앉아 내 양옆에 계시던 아저씨, 아주머니와 짧고 어눌한 영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목청 크고 이기적 이어 보이던 중국인은 나의 편견이었는지 성심성의껏 도와주려고 하던 이 관광객 무리의 따스함이 낯설지만 재밌게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기다려 1인 자리에 착석하고 먹고 싶던 이치란을 즐겼다. 아저씨가 추천해 주신 반숙 계란과 함께.

아저씨 추천 : 이치란 라멘 + 계란 추가




4.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미국 친구 J

여행 넷째 날. 아침 일찍 오피스로 출근한 M을 배웅하고, 오늘은 혼자 무얼 할까- 뒹굴거리며 구글맵을 켰다. 흔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도쿄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전시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숙소 근처에 있던 국립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어떤 전시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탓인지 티켓 부스에 줄이 엄청 길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을 하다 우선 내부 인테리어라도 구경할까 싶어서 발걸음을 돌렸더니 다행히 다른 무료 전시도 진행하는 듯 보여 다른 전시관을 구경하며 상황을 좀 지켜보기로 했다.


도쿄에 있는 국립미술관. 내부가 참 예쁘다


무료 전시를 세 개쯤 구경할 때쯤이었을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생각보다 전시가 너무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무료 전시는 9할 정도가 캘리그래피 전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일본어를 알 턱이 없는 나는 아무리 집중해보려 해도 이 꼬불꼬불한 글씨의 매력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

‘그래도 들어온 김에 빠르게 한 바퀴 돌고 나가자’, 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자, 저- 멀리 한 전시를 집중해서 뚫어져라 보고 있는 배낭 멘 백인 친구 한 명이 보였다. "저 사람은 이 전시를 이해하고 있는 걸까." 하고 궁금해하며 그를 바라보던 와중, 본인을 바라보고 있던 나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그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의도치 않은 눈 맞춤에 나는 뻘쭘한 미소를 지으며 그 공간을 빠르게 벗어났는데, 문제는 그다음 무료 전시에서도, 그 다음다음 무료 전시에서도 그를 계속해서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애써 모른 체하며 (굳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무료 전시까지 서둘러 돌아본 뒤, 한숨을 돌릴 겸 복도에 있던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백인 친구 또한 마지막 전시관을 빠져나와 내 옆 소파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Hello?"


가방을 정리하며 나에게 말을 건 그는 미국인 J.

그는 얼마 전 퇴사를 하고 일본의 전국일주(?)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계속 혼자 다니는 나를 보고 관광객인지 궁금했다던 그에게, 나는 한국인이고 나 또한 퇴사 이후 여행을 온 것이라 하니, 그는 재밌고 반갑다는 뉘앙스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음, 여기 무료 전시 좀 어려운 것 같아. 이해가 돼?"

"아, 나도 잘 몰라. 근데 노력해서 계속 보다 보면 뭔가 조금씩 다른 게 느껴져. 분위기라던가 디테일이라던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자, 그는 꽤나 멋진 대답과 함께, '사실 난 돈이 없어서 무료만 봤어', 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그 단순한 대답에서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상적인 관람자의 태도라던가- 뭐 그런 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짧고 굵은 대화 이후에 그는 배가 고프다며 자리를 떠났고, 나 또한 그토록 고대하던 몬자야키를 저녁으로 먹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이동했다. 어쩌면 유료 전시보다 더 재밌는 경험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이 외에도 아키하바라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소년 2명, 시부야 몬자야키 집에서 만난 한국인 직원 등 재밌던 순간들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가득하다.

일본으로 향하던 비행기에선, "그러고 보니 나 혼자 비행기를 타보는 게 처음이네?" 라며 설레고 떨렸지만, 돌아오던 비행기에서는 "혼자 해외여행을 길게 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라는 부푼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경험은 항상 예측하지 못한,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얻어진다.

막간을 이용해 나를 초대해 준 친구 M에게 감사하며,

여행 참 재밌게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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