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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Dec 15. 2023

정신과 5번째 진료-약을 띄엄띄엄 먹어도 괜찮다.

또다른 동반자-우울증

벌써 다섯번째라니... 놀랍다.

오늘은 손님이 엄청 많아서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30분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요즘은 정말 정신과 가는데 편견이 없는 건가.

신기했다.


그동안 약을 잘 못 챙겨 먹었다.

우울증이 나아졌다고 느껴서인지 마음이 좀 해이해졌다.

하루 안 먹었다고 불안하고 초조했던 초반을 생각하면 정말 느긋해졌다.

그렇게 남은 약이 쌓여가고 있었다.


오늘은 의사도 바빠서 그랬는지 아니면 별로 할 말이 없었는지 별다른 질문이 없었다.

어떻게 지냈냐길래 잘 지냈다고 했고,

뭐 즐거운 일은 없냐길래 남편과 딸이랑 이야기할 때 즐겁다고 했고,

요즘 불편한 건 없냐길래 고민하다 겨우 짜내서 회사에서 벗어나고 싶긴 한데 그래도 다닐만하다고 했다.


의사는 현실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긴 어렵다는 걸 공감해 주면서, 회사에서 보람을 느끼는 부분은 전혀 없냐고 물었다.

나는 회사 일을 잘 해내거나 사고를 사전에 예방했을 때 뿌듯하다고 대답했다.

돈 버는 일인데 얼마나 즐거우랴.


내가 약 먹는 걸 자꾸 까먹게 되는데 이렇게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의사가 웃으면서 약을 안 먹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다.

의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오늘따라 더 따스함을 느꼈다.

그래도 여전히 의사를 경계하고 있긴 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약을 안 먹었을 때 집에서는 감정 기복이 커지는 느낌이다. 엄청 기분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 다시 좋아졌다가 한다. 회사에서는 짜증이 좀 더 자주 난다.'

약이 감정의 폭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맞다면서 약을 띄엄띄엄 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 말을 안 했다.

그냥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다면서 다음 약속을 잡았다.


매주 병원에 가는 게 번거로워 이번에는 2주 후에 오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1주 간격에서 2주 간격으로 늘어난 것만으로도 의사도 내가 나아졌다고 인정하는 것 같아 뿌듯했다.


요즘은 진짜로 그냥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회사는 여전히 싫고 내 적성에도 맞지 않지만, 이직이 쉬운 것도 아니고 당장 돈 들어갈 데가 너무 많으니 어쩔 수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은 학원을 추가로 다니기 시작했고, 물렸던 분양권 입주일은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내가 원하는 일만 하고 살 수 있나.


적성이나 가슴 뛰는 일을 찾기에는 나는 이미 공무원 생활에 최적화되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 아니지, 내가 호랑이인 적이나 있었나?

아무튼 야생 사회에 나가서 뭔가 해보기가 무섭다.

공무원 사회가 너무 안락하다.

그래서 너무 괴롭지만, 그래서 더 못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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