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첫 배는 특별해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정말 배를 오래 타리라는 결심을 하고 첫배에 올랐다.
2,200TEU짜리 컨테이너선이었다. 길이가 200미터 정도였고 거주구역은 6층이었고, 당시 20년 정도 된 배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으윽...(아 다시 생각해보니 엘베가 있었다;;; 헷갈린다... 하하하)
중국과 인도를 왕복하는 정기선으로 한국에는 기항하지 않는 불기항선이었다.
불기항선은 배를 승선한 순간부터 하선할 때까지 절대 한국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의미여서 조금 느낌이 달랐다. 운이 좋으면 6개월에 교대가 되어 한국에 갈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12개월 넘게도 승선해야만 했다.
보통 엔지니어인 기관사들이 항상 구하기 힘들어서 교대가 늦어졌다. 항해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현대상선이라는 네임밸류 덕에 경력 지원자들도 비교적 많았다. 그래서 나는 6개월 만에 첫 휴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같이 승선했던 초임 남자 기관사는 10개월 넘게 승선해야 했다.
동남아를 도는 컨테이너선이라 기항하는 항구가 많았다. 실습 때 탔던 국내연안선만큼은 아니었지만 2~3일에 한번 꼴로 입출항을 하는 셈이었다.
입출항이 횟수만큼 승선은 힘들어진다. 연안으로 오면 배들도 많아지고 접안, 이안을 하는 도중 사고도 많이 나기 때문이다.
원양항해를 나가야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낭만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이 배로 배정해 줬던 담당자가 여자인데 이런 바쁜 배 탈 수 있겠냐면서 이거 타면 힘들어서 나중에 임신 못할 수도 있다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놀렸다. 아직도 편견이 많던 시절이었다.
3등 항해사(3항사)로 처음 승선한 배는 실습생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매일 4시간씩 총 8시간 동안 내가 이 배의 항해를 책임지는 사관이 되는 것에 부담감이 컸다. 모두가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간 동안 나는 브릿지(선박 조종실)에서 사고가 안 나도록 배를 운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사실 초임 항해사가 승선했을 때는 대부분 선장님이 항해사의 능력이 확실해질 때까지 같이 당직을 서주시므로 괜찮긴 했지만, 언젠간 진짜로 혼자서 해내야 할 일이므로 부담이 됐다.
키를 잡고 있는 갑판수에게 조타 명령을 내릴 때 느껴지는 짜릿함도 분명 있었다. 특히나 내 조타 명령이 브릿지에 울려 퍼지던 그 첫 순간은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당당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 큰 배가 내 말 한마디에 움직이다니! 아주 잠깐은 모든 세상을 다 그렇게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이 없을 때다. ㅎㅎㅎ
항해당직을 서지 않을 때는 배에서 꼭 필요한 다른 잡무들을 했다. 선박에 필요한 소화장비들과 안전장비를 점검하는 일부터 입출항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일, 선원들을 위한 의료약품 관리,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관리 및 도서 관리 등의 잡다한 일들을 했다.
그중에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일은 야동관리와 콘돔관리였다. 승선하고 얼마 안 있어 30대 초반이시던 1항사님이 말씀하셨다. "보통 여자 3항사가 타면 이런 일을 남자 실항사나 2항사한테 넘기지만 나는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니가 여자라고 해서 이런 일을 배려해 줄 생각은 없다. 니가 승선한 이상 이 일은 니가 해야 한다." 나도 그 뜻을 받아들여 큰 불만이 없이 하기는 했지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육상 업체에서 선박으로 보내주는 하드디스크 속에 야동 목록이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골고루 다양하게 담겨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이전과 같은 것이 또 올라왔거나 그 양이 적다면 눈치껏 업체에 요구를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상륙 나가는 사람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항구에 입항하기 전 적당량의 콘돔을 미리 휴게실에 비치하였다. 내가 남자였다면 필요한 사람들이 달라고 요구했을 텐데 아무래도 여자인 내게 그런 걸 요구하긴 민망했을 테니 그런 방법을 썼다. 그렇게 휴게실에 비치한 콘돔은 항상 모두 금방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