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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Jul 14. 2023

9. 승선의 재미는 상륙이지!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컨테이너선은 화물작업이 빨리 끝난다.

대형 컨테이너선이 아니고서는 그 항구에 필요한 컨테이너만 내리고 싣고 해서 접안하고 2~3시간 만에 출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보통은 12시간 정도 접안을 하는 편이었는데, 입출항을 하느라 피곤함에도 그 짬을 이용해 상륙을 나갔다.


나는 이때 홍콩과 싱가폴에서 상륙을 나갔다.

24살짜리 여자애가 혼자 상륙을 나간다고 하니 걱정을 하시긴 했지만 그래봤자 부두 앞에 있는 마트에 다녀오는 정도라 내보내주셨다

접안해도 당직을 서야 했기에 내게 주어진 시간은 5시간 정도라 멀리 나갈 수도 없었다.


홍콩과 싱가폴은 항상 끝내주는 야경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빼곡한 도시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될 거다.

입출항 선박들도 많고 밖에서 대기하는 선박들도 많고 항상 생기가 넘치는 느낌을 주는 곳들이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더 잘 즐길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아쉽게도 당시엔 지도 들고 노키아폰 들고 물어물어 다니는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육상에 두발을 디딜 수 있고 마트에 가서 사람 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게 너무나 좋았다.

20명 정도 있는 배에서 여자는 나뿐이라 외로워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필이면 실습 항해사도 없는 배라 더 그랬다.


중국 상해에서는 옆에 한국 배가 붙어 놀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놀러 간 다른 회사 배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회사 분위기에 따라 이렇게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현대는 좀 딱딱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너무 부러웠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배에 올리는 모나미 볼펜 하나까지 깐깐하게 따지는 현대라 엄청 쪼잔하다고 생각했다. ㅎ

나중에 해운 위기 때 그나마 살아남은 현대상선을 보고 그래서 버틸 수 있었나 싶어 다시 생각해보기는 했다.


인도 뭄바이에서도 상륙을 나갔다.

접안이 2일 정도 되는 긴 시간이라 선기장님들과 1항기사님들이 배려해 주어 동기 기관사와 둘이 어리바리 까며 하루를 통째로 놀러 나갔다.

재학생일 때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었다 보니 어색했지만 그래도 초임이라는 공통점으로 나름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였다.

그 남자 기관사도 남자 항해사랑 같이 탔으면 조금 덜 힘들었을 건데 여자인 나랑 같이 타는 바람에 더 많이 고생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뭄바이 부둣가 시골에서 내려서 어찌어찌 현지인들과 섞여 나룻배를 타고 시내로 갔다.

택시기사가 호객행위를 했지만 바가지 쓸까 봐 무시하고 우리끼리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모든 것이 새로운 나라이자 신기한 곳이었다.

하지만 갈 곳이나 볼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냥 완전 낯선 나라에 와봤다는 호기심을 충족해 주는 정도였다.

기억에 남는 슬픈 모습은 있었다.

길거리에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삐쩍 마른 채 누워있는 여자와 그 옆을 맴도는 피골이 상접한 아이를 보았다.

너무 놀라 힐끗힐끗 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아주 잠깐 맛보았던 인도의 모습은 영국왕이 기념으로 세웠다는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뭄바이'의 웅장함과 대조되어 어색하고 씁쓸함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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