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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Jul 16. 2023

11. 승선 준비 우울감-휴가는 끝.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휴가를 실컷 즐기고 다시 승선을 하려니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승선이 나쁘지 않았는데 좋았는데 참 이상했다.

새로 만날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고 새로 승선할 배에 대한 설렘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꼭 자유가 억압되는 감옥에 제 발로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무리 오래 승선을 해도 이런 기분은 다들 느낀다고 했다.

그 감정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하다.


하선할 땐 언제나 좋고 승선할 땐 왠지 모를 기분 나쁨.

긴 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할 때의 기분이 비슷한 것 같긴 한데 그 정도가 좀 더 심한 느낌?

승선 준비 우울감은 누구나 조금씩 겪는 것 같다.

그러다 막상 배에 가면 또 괜찮아진다.

배가 내 집이다 생각하면 거기서 적응을 하게 된다.


캐리어에 필수품인 생리대를 가득 채운 후 승선한 두번째 배는 '퍼시픽 석세스'라는 배였다.

십몇년이 지나도 이름을 절대 안 까먹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배다.

2만톤 가량의 20년 정도 된 배였다.

우리나라에 딱 4척만 있는 핫코일 운반선 중 하나라고 했다.

핫코일은 쉽게 말해서 자동차 외판을 만드는 철판을 돌돌 말아놓은 거였다.

우리나라에서 1년에 4번 정기적으로 미국으로 수출을 했다.

그 외 남는 시간 동안에는 주로 석탄을 날랐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핫코일을 싣고 미국에 가서 내려준 후,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서 석탄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승선했던 2007년에 철강제품 가격들이 치솟다 보니 평소에 안 가던 항구를 기항하기도 해서 그 작은 벌크선을 타고 생각보다 많은 항구들을 가게 되었다.

정기항로를 운항하는 배는 항해사들이 상대적으로 편한데, 부정기항로를 운항하는 배는 항해사들이 매번 새로 항해계획을 짜야하고 숙지해야 하니 일이 많아진다.

새로운 항구를 들어가는 일은 항상 긴장되는 법이었다.


퍼시픽 석세스는 벌크선치고는 작았고 이상하게 배가 낡았다.

이 배는 진짜로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브릿지에 난방이 안 됐다. 고장이 났는데 고칠 수가 없다고 했다.

아니 그 추운 북태평양을 그런 배로 건너가라니 진짜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브릿지 당직을 방한복에 장갑에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섰는데 추우니까 확실히 잠은 안 오더라.


선내 에어컨도 제대로 작동을 안 했다.

웃긴 건 브릿지에 에어컨은 따로 설치해 줬다는 거다.

기계들이 열에 민감하니 설치해 준 건지 더우면 항해당직이 위험하니 설치해 준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인간을 위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인간을 위했으면 다른데에도 다 설치해줬어야지...

아무튼 더럽게 춥고 더운 배였다.


이전 3항사가 바로 내 입사동기 여자여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배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인수인계를 받으니 잠시나마 위로가 되었다.

같이 승선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오버랩이 끝난 후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실습항해사가 있었는데 남자였다.

이런 배에서는 여자 3항사 밑에 남자 실항사가 있는 게 좋다고 회사에서 생각한 듯했다.

어쨌든 3항사 입장에서 실항사가 누구든 있다는 건 좋았다.

내가 할 잡일이 분산되기도 했고 부담없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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