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실수투성이 신조선 인수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신조선들은 보통 시리즈선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선박 설계를 한 번 하면 한 대만 만들긴 아까우니 똑같은 사양으로 몇 대 더 만드는 거다.
단독 주택 단지의 집들이 다 비슷한 것도 같은 이유 아닐까.
똑같이 만들면 아무래도 자재값도 절약할 수 있을 테고 여러 배를 계약하면 가격도 깎아줄 테고.
그래서 시리즈선 중 첫 번째 선박이 가장 중요하다.
거기서 하자를 다 찾아내야 조선소에서 무료로 고쳐주고 다음 배들에도 적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첫 입주 때 하자 잡는 게 중요한 것처럼.
그래서 첫 번째 신조 인수 멤버들은 정예들로 꾸려진다.
내가 탄 배는 3번째인가 4번째 배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부담은 적었다.
이미 앞 배들이 했던 자료들을 고스란히 받아서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모든 것을 다 처음 세팅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실수도 잦았고 선장님이나 1항사님이 시키는 일만 하는데도 버거웠다.
특히나 당시 2항사님이 회사에서 정말 인정받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년 반 만에 2항사 조기진급도 하고 나중에는 1항사도 3년 만에 달았고 선장도 동기 중에 제일 먼저 된 사람이었다.
그 2항사님은 신조인수도 여러 번 해봤다고 했고 그래서 그런지 정말 일을 잘했다.
선장님과 1항사님의 두리뭉실한 업무지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캐치해 내는지 정말 놀라웠다.
나는 시킨 대로 해간 것 같은데 아니라고 다시 하라고 빠꾸를 계속 먹었는데 말이다.
거기다 고집이 센 두 분 사이에서 중간 역할도 굉장히 잘했다.
첫 번째 배에서 선장과 2항사, 1항사와 갑판장이 각각 편먹고 대립했던 상황이 있었기에 그렇게 조절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진짜로 선장과 1항사 두 분이서 소리 지르고 멱살 잡고 싸우기도 하고 심각했다.
나는 초임이라 뭣도 모르고 양쪽에 시달리며 중립을 유지하는 척하느라 급급했었는데...
어쩌면 2항사님이 있어서 회사에서 악명 높은 그분들한테 덜 시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3항사 세 번째 배가 이 지경이라니 왜 그렇게 적응을 못했는지 매일 핀잔을 먹는 게 일이었다.
당시엔 나도 왜 그렇게 덤벙대고 실수를 해댔는지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들이 대인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선원들 다 동원돼서 일하는데 몰래 휴게실 도망간 것도 모자라, 워키토키로 신조인수 힘들다고 친구랑 하는 전화통화를 전 선원들한테 생중계하기.
1항사가 진짜 짜증 나게 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1항사한테 보내기.
디빅스 신청을 잘못해서 한 항차(40일)는 결국 업데이트 못하고 본 거 또 보게 만들기.
뭐라 잔소리하면 뚱한 표정으로 듣기. 등등등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이 없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