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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Jul 25. 2023

19. 두 번째 천국은 1주일 만에 끝.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두 번째 배를 내리고 집에 가서 밀린 잠을 미친 듯이 자고 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땜빵난 배에 올라가 달라고.

집에 도착한 지 이틀 만이었다.

쳇바퀴 도는 당직에서 벗어나 정말 오래간만에 즐기는 늦잠이었는데......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짓고 있는 신조선 인수 멤버로 가달라고 했다.

슈퍼 사이클이라 불리는 해운 호황기라 신조선을 엄청나게들 지었는데 현대상선은 현대건설 인수한다고 현금을 모으느라 다른 회사들보다 조금 덜 공격적이었다.

그래서 신조선 인수 멤버로 갈 기회가 적어 욕심이 났다.

근데 6개월 승선했는데 1주일 만에 쉬고 다시 승선을 하라니... 너무했다.


알고 봤더니 남자애들 다 전화 돌렸는데 안 간다고 거절해서 나한테까지 기회가 온 거였다.

어떤 애는 이거 거절해서 회사에 밉보였으니 되게 똥배 타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운이 좋게 LNG선을 타게 되었다.

이런 걸 보면서 뭔가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LNG선은 전시 국가필수선박으로 분류되어서 월급이 제일 많고 복지도 좋고 한국인만 탈 수 있는 배였다.

또한 어떤 화물선을 타냐에 따라서 항해사가 육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종류가 정해지는데, 솔직히 컨테이너선이나 자동차운반선 경력으로는 육상에 설 자리가 적었다.

LNG선 유조선 등이 월급도 많이 받고 경력적으로도 유리했다.


위험화물을 다뤄야 하니까 승선 조건도 까다로워 성적순으로 우수한 사람들만 태웠는데 당시에는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여자는 안태웠다.

상대적으로 항로도 단순하고 화물도 위험하지만 깨끗하고 일정도 정기항로라 여러 가지로 타기 좋은 배였는데 어쩔 수 없었다.


결국엔 언제 신조 인수를 해보겠나 싶어 내가 가기로 했다.

대신 2달만 타면 금방 내려준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신조 인수 기간에 1달 동안은 인근 모텔에서 숙박하며 현대중공업으로 출퇴근을 했기 때문이다.

또 중공업 취직도 고민하던 와중이었기에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첫 번째 휴가 때는 입사 연수할 때 사귀었던 동기 항해사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 막 울고불고했었는데, 두 번째 휴가 때는 뭐 상관없었다.

진짜 그 동기 남친이랑은 둘 다 초임 3항사라 어리바리하고 힘들었을 때라 좀 안 좋게 헤어졌다.

그래도 하루 한번 위성 접속해서 받는 이메일로 정을 느끼고, 서로 탄 배의 항로가 겹칠 때면 VHF며 MF/HF며 통신기기를 다 동원해 서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애틋하게 목소리 듣고, 싱가폴 기항할 때 같은 대리점을 이용하니 부탁해서 선물도 주고받고 그랬던 것 같은데 뭐 그냥 인연이 아니었겠지.


어쨌든 내게 온 기회를 위해 남은 며칠만이라도 잠 실컷 자고 엄마밥 좀 먹고 바로 짐 싸서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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