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범죄자 취급받던 미국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컨테이너선은 속도가 빠른 편이다.
평균 23노트(약37키로)라니 너무 빠르다.
자동차 속도 생각하면 우습긴 한데 배라서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
이전에 타던 선박보다 크기도 커져서 안 그래도 조종하기 부담되는데 속력도 1.5배는 빠르다니.
바로 직전 선박 길이 200미터짜리 퍼시픽 석세스 벌크선이 15노트(약22키로)정도로 항해했는데 미국까지 가는데 14일 정도 걸렸다.
그런데 컨테이너선으로 가보니 그땐 정말 거북이처럼 기어간 거였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9일 만에 갔다.
9일 만에 7시간 시차를 맞추려니 죽을 맛이었다.
이전에는 14일 동안 2일에 한번 1시간씩 조정하면 여유롭게 미국 서부 시차에 맞출 수 있었는데, 9일은 매일 조정해야 하니 너무 빡빡했다.
시차에 적응하느라 당직시간에 매번 정신이 멍해졌다.
비행기는 한 번에 가니까 하루 만에 바뀌는 건데, 배는 가면서 바뀌어야 하니... 몽롱했다.
엔진의 발전으로 빨라지는 게 선원들한테는 별로 좋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세월아 네월아 가면서 받는 돈이나 빨리빨리 가서 받는 돈이나 똑같으니까.
컨테이너선은 정기 화물선이라 스케줄이 생명이었다.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했다.
벌크선 같은 여유로움은 전혀 없이 바쁘게 돌아다녀야 해서 바다의 낭만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전에도 가봤던 미국인데 이번에 간 미국은 달랐다.
컨테이너 부두에 접안하는 거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미국 해양경찰들이 선박에 올라왔다.
허리에 권총을 차고 올라와서는 전 선원들을 소집시켜 놓고는 여권과 명단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고 간단한 질문을 했다.
처음 겪어보는 일에 당황스러웠다.
왜 우리가 이런 취급을 받는 거지?
미국이 별 건가?
일해야 하는데 바빠 죽겠구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무 기분이 나빴다.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는 듯했다.
2001년 9.11 테러 여파로 선박검문검색도 강화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바로 이전 배에서는 안 하던 일을 당하려니 짜증이 났다.
한국인들은 테러를 도모한 적도 없고, 밀입국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를 뭘로 보고 그러는지 자존심이 상했다.
옛날에는 미국으로 밀항하는 한국 선원들이 실제로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나 배를 안태우고 까다롭게 자격을 부여했다고 들었다.
월북 위험성도 있었고...
어쨌든 시대가 달라졌는데 그래서 내가 탄 배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일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을 당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 컨테이너선을 탔을 때는 미국에 갈 때마다 매번 경찰들한테 검문검색을 당해야만 했다.
그 이후 2008년 말 한미 무비자 협정이 시행되면서는 한국 선박에 대한 검문검색이 좀 나아졌다고 들었다.
미국 비자받으려고 추운 겨울날 미국 대사관 앞에서 긴 줄을 서고 대기했던 걸 생각하면 진짜 좋은 세상이 되긴 했다.
사실 밀항은 요즘에도 종종 일어난다.
미국 밀입국 이민자 문제를 생각하면 여전한 문제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시도도 꽤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미얀마 내전이 일어났을 때 미얀마 선원들이 한국으로 밀항을 시도한 적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해양경찰도 요주의 선박이 입항할 경우 밀항자 감시를 신경 써서 하고 있다.
가끔 베트남, 중국 등 저소득 국가 사람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무모하게 바다에 뛰어드는 일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그때 미국에서 우리를 경계했던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되면서 불쾌했던 감정들이 괜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