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필리핀 유부남 부원의 사랑 고백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진짜 그때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배에 여자가 주로 한두명 뿐이다 보니 남자들의 고백은 흔한 이야기이다.
매일 같이 밥 먹고 같이 일하고 마주치는데 정이 안 쌓일 수가 없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자가 조금만 잘해줘도 자기 좋아하는 줄 알고 정신 못 차리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호의가 고백으로 돌아오면 당황스럽다.
거절하면 나쁜 년 되고... 일하기 불편해지고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특히나 상사가 고백한다면? 최악이다.
부하직원 괴롭힘의 주 대상이 된다.
그런 남자가 많냐고?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배 타는 동안 한국사람에게는 한 번도 고백받지 못했다.
왜 그럴까 고민을 해본 적이 있는데 일단 내가 남자들한테 본능적으로 곁을 안주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진짜 그냥 기가 세 보여서 싫어한 걸 수도 있고...
이걸로 어릴 땐 상처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일할 때 누가 날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거니 더 편하구나 싶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진심 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고립된 일터에서 원치 않는 고백받는 게 결코 부럽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 다 받는데 나만 못 받은 건 좀 거시기하다.
한국 사람한테는 구애를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저씨들은 날 좋아해 주셨다.
갑판장님도 일할 때 제일 먼저 챙겨주시고 수다도 떨어주셨고, 조기장님들도 다 이상하게 날 좋아하셔서 당직 설 때 같이 놀아주셨다.
조리장님들은 맨날 맛있는 야식을 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만들어 배달까지 해주셔서 아무리 일해도 살 빠질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필리핀 부원한테 것도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한테 고백을 받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바빠도 놀 시간은 나는 법이니까 당시 저녁을 먹고 나면 잠시 탁구를 다 같이 쳤다.
운동신경 제로인 나는 당연히 끼기가 어려웠는데 나도 같이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서 탁구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 필리핀 부원이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당연히 고맙다고 하고 같이 탁구를 치는데 한 3번쯤 쳤을까?
갑자기 탁구대 옆에서 무릎을 꿇더니 별안간 고백을 했다.
으악...
내가 나 한국에 남자친구 있다고 했더니 더 가관이다.
상관없다. 나도 필리핀에 와이프 있다. 너는 내 한국 여친, 나는 네 필리핀 남친하자.
이게 무슨 말인지 방귀인지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일단 어떻게 잘 거절을 하고 방에 올라왔다.
그 이후부터는 이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브릿지 당직을 서는데 선내 전화가 울려서 받으 면 "I see you. You are beautiful."
이런 소릴 하는 거다.
기관실에서 CCTV로 나를 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너무 소름이 돋았다.
당직이 끝나고 방에 돌아오면 더 무서웠다.
방문 밑에 사랑고백이 가득한 편지가 있었다.
내가 계속 피하자 그 부원의 맥주 구매량이 치솟았다.
무슨 일이 날까 봐 문단속을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여자 방에만 따로 달리는 문걸쇠를 꼬박꼬박 챙겼다.
예전에는 이런 걸 왜 굳이 설치하는지 돈 낭비 같았는데 이제는 너무 소중해졌다.
그러다 그 부원이 한 번만 만나달라 사정을 했다.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래도 조금 친하게 지내던 2항사와 3기사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부원이 고백을 했는데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혼자 가기가 너무 무섭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 별일 있겠냐 그냥 가서 잘 말하면 되지.
둘 다 하던 게임을 하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결국은 약속 시간에 혼자 사무실로 갔다.
그 부원이 딱히 위협을 가한 적도 없고 그냥 날 좋아한다는 것뿐인데 무시까지 하기는 좀 미안했다.
그래서 나가서 다시 잘 말하겠다는 생각으로 나갔다.
다행히 대화가 통하는 상태였고 깨끗이 단념하기로 하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불안해서 계속 배를 탈 수 있을지 신경이 쓰였는데, 회사에서 마침 교대를 해주었다.
거의 9개월째 승선하고 있는 셈이었고 아다리가 잘 맞았다.
남자 3항사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배를 하선한 후에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