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메리 Aug 15. 2023

31. 대기업 승선 경력도 애 엄마에겐 무쓸모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퇴직은 의외로 손쉽게 수리가 되었다.

승선 인력은 항상 부족해서 퇴직한다고 하면 못 그만두게 엄청 말린다고 해서 잔뜩 긴장하고 퇴직 이야기를 꺼냈는데 나는 너무 쉽게 받아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리먼사태 영향으로 2009년 하반기에 인력 감축을 하려고 준비중이라 그런 거 였다.

그런데 내가 자발적으로 그만둬준다니 좋았나 보다.

그때 그런 걸 알았다면 안 그만뒀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운 좋게 바로 대학교 인턴 조교로 일할 수 있었다.
임신한 상태라 취직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한창 청년취업률을 올리겠다며 정부에서 대학교 인턴 계약직을 많이 뽑던 시기라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10개월짜리 인턴이었지만 3개월 출산휴가도 보장해 주었다.
덕분에 임신기간과 출산 후까지 한동안 인턴 월급+계약 종료 후 실업 급여까지 받을 수 있어 100만원가량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첫째가 2010년 4월생인데, 그 해 8월 7급 공무원 경력경쟁채용 시험이 있었다.
순승선경력 2년 이상 있는 사람만 지원할 수 있는 거라 경쟁률이 높진 않았다.
신생아를 돌보고 살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건 그렇게 어렵진 않았지만... 경쟁자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공기업으로 눈을 돌렸다.
경력과 스펙은 마음에 들었는지 면접은 당시 꽤 많이 봤다.
모유를 제때 빼주지 못해 가슴이 돌덩이처럼 아파오는 걸 느끼면서도 취직이 하고 싶었다.
면접관들이 내게 하는 질문이라고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 건지, 애는 하나 더 낳을 것인지 같은 것들 뿐이었다.
이럴 거면 왜 불렀는지 내 시간만 허비한 거 같아 아까웠다.


제일 상처가 됐던 면접은 대학교 실습선 항해사 면접이었다.
경쟁자들보다 내가 스펙도 경력도 훨씬 좋았고 교수님들은 학교다닐 때 나를 알기 때문에 애가 있어도 열심히 일 하리란 걸 알아줄거라 믿었다.
하지만 교수님들은 면접시간 30분 동안 내게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설교만 늘어놓았다.

현실에 대해 절실히 배우게 된 순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라곤 "세상이 바뀌었다, 여자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같은 말들이어서 정말로 그런 세상이 된 줄 알았다.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일도 가정도 성취할 수 있는 세상인 줄 알았다.
처음에는 이런 부조리한 사회를 원망했다.
나에게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어른들을 원망했다.


그렇다고 사회가 바뀌는 일은 없기에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래서 당시 해사고등학교 방과 후교사도 했고, 해양경찰 학원 강사도 했고, 교수님을 통해 받은 번역 업무도 했다.

하지만 모두 단기 업무였다.

당시 남편도 있고 애 낳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사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들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같이 산지 2달 만에 이건 아니란 생각에 이혼을 해야겠단 생각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당시에도 전남편만 믿었다간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자리를 열심히 찾는 내게 보험 영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도 들려왔다.

대학 때 쌓았던 수많은 남자 선배들 인맥은 당연하게도 결혼하면서 끊겼고 그리고 그 때 애 낳은 날 써 줄 회사도 없었다.
애 엄마도 할 수 있으면서 안정적인 일.
결국 남은 건 결국 공무원 뿐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