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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Nov 02. 2023

27.어색한데 익숙한 진짜 재혼생활 시작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었다.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재혼해 살고 있습니다.

신혼방이 아니라 피씨방임. 헤드폰은 왜 저리 종류가 많은지...

남편이 정식으로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 가져온 짐은 소박했다.

우선 봄, 여름에 입을 옷과 신발을 담은 캐리어 2개.

그리고 엑스박스와 플레이스테이션, 의자, 모니터 등...


35평 방 3개 중에 현관 쪽에 붙어있는 작은 방이 내 방이었는데, 그 방의 책장과 책상 구조를 살짝 바꾸고 붙박이 옷장 한 칸을 비우고 정리를 하니까 어찌저찌 다 들어갔다.

나보다 옷이랑 신발이 훨씬 많았다...

다 정리한 우리 방은 신혼방이 아니라 피씨방 같았다.


그래도 신혼이라고 이쁜 새 이불 세트를 친정엄마가 장만해 주었고 작았던 화장대도 좀 더 큰 걸로 새로 샀다.

웨딩촬영 때 찍은 액자들도 벽에 걸어놓으니 결혼한 느낌이 나기는 했다.

그래도 피씨방 느낌이 더 나지만...


이 좁은 방에서 둘이 어떻게 살까 걱정되었는데 신기하게 살아졌다.

하긴 지금보다 더 좁은 데서도 잘만 살았는데 싶다.

지금 집으로 이사하고 대궐같이 엄청 넓다고 좋아한 지 이제 겨우 3년 됐는데 벌써 좁게 느껴진다니 우습다.


남편과 처음으로 내 방에서 같이 자는 날은 너무 어색한데 너무 좋았다.

안심이 확 되었다.


친정엄마도 신경은 쓰이는데 묘하게 안심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여자끼리 편하게 살다가 남자랑 같이 지내야 한다는 건 불편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안심되는 그런 게 있었다.


딸은 마음에 안 들어하는 티가 팍팍 났다.

항상 심심하다고 나를 귀찮게 하는 게 주된 일이었는데, 계속 문을 닫고 안방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안 비쳤다.

한 한 달쯤 그랬다.

같이 밥 먹고 마주칠 때마다 남편이 딸에게 웃으면서 말 걸어주고 하다 보니 서서히 경계심이 풀어졌다.

더구나 할머니나 나의 태도도 좀 더 밝아지고 남편을 환영하는 분위기라서 그런지 딸도 점점 평소대로 돌아왔다.

남편이 안 보이면 아저씨 어디 갔냐고 묻기 시작하고 존재를 궁금해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남편이 주2일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나보다 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게 좋은 효과를 얻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저씨를 괴롭히는 건지 노는 건지 둘이 절친 사이가 되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 고민들을 미주알고주알 아저씨한테 털어놓기 시작했고, 같이 춤추자, 피구연습하자면서 귀찮게 굴었다.

친정엄마는 처음에는 그런 딸과 남편이 무슨 얘길 하나 무슨 놀이를 하나 엄청 신경을 곤두세우고 신경 쓰는 듯하더니 서너달 지난 후부터는 안심하는 것 같았다. ㅎ

틱톡 따라하기. ㅋㅋㅋ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남편은 우리 집 여자들과 친해졌다.

진짜 친화력 최고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엄마인 나보다 할머니와 자기 시작했었기에 잠자리가 바뀌어서 힘들 걱정도 없었다.

여기서 내가 교대근무했던 게 조금은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야간근무 힘들어서 그만둬야겠다고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딸이 그래도 돈 더 벌 수 있으니 그냥 하고 쉬는 날 어디 놀러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면 되지 않겠냐고 했었는데 이러려고 그랬나 싶었다. ㅎ


아들이 면접교섭을 왔을 때는 셋이서 좁은 방에서 같이 잤다.

아들은 셋이 같이 잔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신기할 정도로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게임 생각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중1 남자아이의 뇌는 그렇게 단순한가?

어쨌든 셋이 같이 자는 걸 보고 딸이 오빠를 좀 질투하는 것 같았는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던 지라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호칭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불거졌다.

나나 친정엄마나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면 되지 했는데, 딸의 친구들이 자꾸 이상하게 봤다.

엄마가 재혼했으면 새아빠 아니냐며 왜 아저씨라고 부르냐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딸에게 훈수를 두는 거였다.

거참... 허허허

딸은 자기 맘이라고 아무도 뭐라 안 한다고 당당히 대꾸를 하긴 했는데 자기도 신경이 쓰였긴 한가 보더라.

친아빠가 버젓이 있고 가끔 만나고 있는데, 자기가 다른 아저씨에게 아빠라고 부르면 친아빠를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친아빠는 엄마 재혼한 거 아냐며 자기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걸, 당연히 친아빠도 그 사실을 안다고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주었다.


지난달에 동네 그림 그리기 대회를 딸이 나갔는데, 주제가 가족이었다.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해서 계속 졸랐더니 아주 잠깐 나만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게 보여주기 부끄러웠을까. ㅎ

아저씨를 가족으로 완전히 인정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랬으려나? ㅎ

딸이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이런 가족을 만들어주게 된 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저씨를 잘 받아들여주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훨씬 낫다. 정말.

우리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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