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로 자라는 마음

by 있는 그대로 엄마

아이가 4학년 때이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 놀고, 친구들과 동네 목욕탕 냉탕에서 수영하고, 자전거로 목동 단지를 누비던 너. 세상의 기쁨을 다 가진 얼굴이었다.

이제 고학년이 되었으니, 좀 더 큰 자전거가 필요하다 해서 큰 맘 먹고 자전거를 사주었다.

그런데 새 자전거가 며칠만에 헌 자전거처럼 되어 있었다.


"자전거가 왜 이래?"


"아...이거...애들이 언덕에서 막 타고 내려와서."


단지 안 언덕 계단을 자전거로 내려오는 놀이가 유행이었나 보다. 계단을 내려오면 본인 자전거가 금새 망가지니까, 새 자전거가 생긴 아이에게 우르르 몰려가 계단을 여러 번 내려오는 사이, 자전거가 망가진 것이었다.


“엄마가 사준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건 싫어. 네가 직접 망가뜨린 건 아니지만, 친구들이 그렇게 못 하게 하는 것도 네가 물건을 관리하는 방법이야.”


그리고 일년 쯤 뒤인 5학년이 되었을 때다.

저녁 식사 무렵,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농구하러 간다고 나가는 아이의 표정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30분쯤 지나, 마음이 불안해져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나, 지금 삼천리 자전거 앞이야."


"농구하러 간다더니, 거긴 왜 갔어? 그리고 곧 저녁 먹을 시간인데, 언제 올거야?"


"엄마, 지금 00이랑 00이 엄마랑 같이 있어."


"왜? 잠깐만...엄마가 바로 갈게."


아이의 목소리가 잔뜩 주눅들어 소곤거리며 말했다.

단지 앞 아파트에 사는, 예전에도 한 번 본적 있는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가 함께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이신가요?"


“1년 전에 친구들이 아이 자전거를 망가뜨려서 아이가 너무 속상해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친구들에게 다 연락했는데, 아무도 안 나오고 얘만 나왔네요.”


자전거는 바퀴가 닳고 흙이 잔뜩 묻은, 낡은 자전거였다.


'1년 전이라고? 1년 전 일이 아직 마음에 남아서 이제야 아이를 불러낸거라고?'


1년 전 일로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아이와 엄마.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오죽 속상했으면 이럴까 싶었다.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짐작은 갔다. 단지 안 언덕 계단에서, 남의 자전거를 타고 놀았겠지.

힘 센 아이 같았으면 건드리지도 않았겠지...


"아줌마가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많이 속상했지? 아줌마가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좀 풀릴까?"


"자전거 하나 새로 사주세요."


"자전거를 하나 새로 사는 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어렵고…바퀴가 많이 낡았네. 아줌마가 새 바퀴로 바꿔주는건 어떨까?"


"좋아요."


우리는 바로 '삼천리 자전거'로 들어가 바퀴를 교체했다.

우리는 어색하게, 말없이 바퀴가 교체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자전거가 수리되었고, 나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그 길에서, 아이는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 팔짝팔짝 뛰며 외쳤다.


"엄마가 졌어! 엄마가 진거라고! 대체 엄마가 걔 자전거 바퀴를 왜 바꿔주냐고? 왜?"


그 순간, 내가 실수한건가 싶었다. 아까 그 아이가 너무 속상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해버렸던 건데.


"너하고 다른 애들이 쟤 자전거를 그렇게 한 거 아니야?"


"아니야! 다른 애들이 그랬고, 나는 아니라고! 그래도 나는 사과해야할 거 같아서 나간건데, 다른 애들은 아무도 안 나오고, 그것도 너무 억울한데, 왜 나만 걔 바퀴를 바꿔줘야 하냐고!"


"네 말을 미리 들었더라면 좋았을 걸. 엄마가 그건 실수한 거 같아. 미안해. 그런데, 니가 그랬건 안 그랬건, 엄마는 그냥...걔 자전거 고쳐주고 싶어. 그게 마음이 편해."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사춘기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00이 기억나? 예전에 엄마가 자전거 고쳐준거. 엄마가 걔한테 사과해줘서 고마웠어. 당시에 애들이 걔를 좀 만만하게 보고 그랬어. 사실 나도 걔 자전거 함부로 탔었고. 근데 엄마가 대신 사과해준 덕분에 지금 걔를 볼 때 마음이 편해. 죄책감도 없고. 엄마가 그렇게 안 해줬으면, 아마 지금처럼 걔와 자연스럽게 지내지 못했을거 같아. 고마워, 엄마."



내가 건넨 사과가, 아이 마음에 죄책감을 비워주었구나.

다행이다. 그래도, 그렇게 해두길 참 잘했다.

사과는 때로, 마음을 자라게 한다.


#초등학생 #사과 #친구관계 #자녀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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