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를 기억하는가? 주근깨투성이에 양갈래머리를 한 말괄량이 여자아이 삐삐. 우리 세대에게 ‘삐삐’는 꽤 익숙한 이름이다. 동화책, TV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로 접했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원천소스는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의 〈삐삐 롱스타킹〉(1945). 스웨덴은 ‘삐삐’가 나온 1945년을 어린이문학 원년으로 삼고 있다니, 작가와 작품 캐릭터가 한 나라 문학사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삐삐 시리즈 외에도 〈산적의 딸 로냐〉, 〈사자왕 형제의 모험〉, 〈미오 나의 미오〉 등 100여 편이 넘는 작품들을 썼는데, 그녀의 책은 안데르센, 그림형제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세대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린드그렌은 1958년에 어린이책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받았다.
《비커밍 아스트리드 Becoming Astrid》(2021)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페르닐레 피셰르 크리스텐센이 감독하고, 알바 어거스트(아스트리드 역), 헨릭 라파엘센(블룸버그 역), 마리아 보네비(한나 역) 등이 출연한, 스웨덴과 덴마크 합작 영화다.
한 인물의 생애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보통 전기적 구성을 띤다. 출생부터 성장, 고난, 죽음까지. 그 인물의 뛰어난 업적을 중심으로 시놉시스를 구성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영화는 ‘삐삐’는커녕 작품 얘기는 전혀 꺼내지도 않은 채 스토리가 끝난다. 영화의 제목에 ‘비커밍 becoming’이 붙었으니, ‘아스트리드’라는 작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인 듯싶다.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액자식 구성으로, 스토리 앞뒤에 노년의 아스트리드가 자신 앞으로 온 어린이들의 생일축하편지를 읽는 장면이 있다. 이 편지들은 영화 중간중간에 아이들의 내레이션으로 삽입된다. 이 내레이션들은 중심 스토리와 느슨하게 연관되면서 이 스토리가 한 동화작가의 실화야, 그녀는 이러이러한 고난을 겪고 작가가 되었어, 라는 메시지를 수시로 전달한다.
이야기는 아스트리드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로, 이후 그녀 동화의 기본틀이 되는 경험들을 다루고 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모든 순간은 다 처음이다. 스물의 나도 처음이고, 서른, 마흔의 나도 처음이다. 아무리 지식과 경험이 많다 해도 매순간 부딪치는 자잘구레한 일상은 모두 처음이다. 누구나 처음은 두렵다.
그중에서 인생의 초반, 10대 중후반에서 20대까지의 삶은 모든 것이 특히 더 새롭다. 비축된 경험이 없는, 모두 날것의 새로움이다. 설렘과 기대와 불안이 혼재된 순간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절을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첫입학, 첫시험, 첫실패, 첫취직, 첫사랑, 첫이별 등등. 모든 사랑은 귀하고, 모든 이별은 아프지만, 접두사 ‘첫’이 붙는 순간 그것들은 아주 특별해진다.
이 영화 역시 젊은 아스트리드의 생애 ‘첫’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아스트리드, 그러나 1920년대 스웨덴 시골에 사는 여자아이가 맞닥뜨린 현실은 각종 규율과 집안일뿐이다. 이야기 꾸며내는 걸 좋아하고, 무언가 쓰고 싶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16살의 아스트리드에게 시골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공간이다. 아스트리드는 댄스파티에서 아무도 자신을 선택해 주지 않자, 친구와 둘이 춤을 추고 나중에는 무대 중앙에 나와 흥에 겨워 혼자 신나게 막춤을 춘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아스트리드 삶을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복선이 된다. 누군가 곁에 있으면 좋겠지만, 없다면 혼자라도 당당히 살아가겠다는 선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골 신문사의 인턴을 시작으로 좀더 큰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친구 베르타의 아버지이자 두 번째 아내와 이혼소송중인 중년의 남자 블룸버그가 신문사 사장이자 편집장이다.
멋진 글이야. 넌 별처럼 반짝여. 나 좀 비춰줘. 네가 필요해.
그가 아스트리드의 글을 칭찬하며 한 말이다. 신문사 편집장이 이렇게 달달한 멘트를 하면, 한창 세상을 알고 싶고 문학적 감성으로 터질듯한 사춘기 소녀는 바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임신. 그러나 블룸버그의 이혼 재판은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고, 아스트리드의 존재가 이혼소송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한 블룸버그는 그녀를 스톡홀름으로 보내 비서수업을 받게 한다.
아스트리드는 미혼모를 도와주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덴마크에 가 아이를 낳고 위탁모에게 아이를 맡긴 채, 스톡홀름에서 직장다니며 혼자 산다. 아이를 데려온다 데려온다하고 지낸 세월이 2년 반. 결국 아스트리드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블룸버그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때 그가 한 말.
애는 기를 수 있어?
간신히 먹고 살잖아.
돈줄이 끊기는 건 알지?
이게 아이 아빠가 아이 엄마에게 할 소리인가. 이런 아빠라면, 이런 남편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다. 스윗한 멘트를 잘하는 사람들이 모질고 독한 말도 잘한다. 아스트리드는 혼자 아들 라세를 데리고 와 키운다. 아들은 오자마자 낯선 환경에 백일해까지 걸려 고생하고, 밤새 아들 곁에 지키느라 직장에서 조는 아스트리드. 그녀를 본 마음 따뜻한 직장상사는 의사를 보내 아이가 진찰받게 도와주고, 그녀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그가 바로 스투레 린드그렌.
영화의 후반부, 아스트리드는 아들을 재우기 위해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낸다. 이게 바로 우리가 읽게 되는 아스트리드 동화의 시작일 게다.
모두 소다를 마시는 마을이 있었어.
'굿모닝'이라고만 인사했지.
어른들이 애들한테 화가 나서 애들을 다 쫓아내면서 벌어진 일이야.
애들은 새로운 곳에 가서 마음대로 살았어.
뭐든지 스스로 하고.
하지만 그냥 아이들이라서 뭘해야 할지 몰랐지.
서로의 다리를 베개 삼아 베고
옷을 뒤집어 입고
밤에도 '굿모닝'이라고 인사했어.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라는 아이의 말이 아스트리드로 하여금 계속계속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했고, 이것이 바로 아스트리드라는 세기의 작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영화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 아스트리드 인생의 중요한 첫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경험이 어떻게 작가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는지 그 험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보통사람이었으면 다시는 소환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겠지만 아스트리드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단단해져, 씩씩하고 신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녀의 동화 속, 혼자서도 꿋꿋하게 잘사는, 독립적이고 명랑하고 장난끼 많은 인물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스트리드는 스투레와 결혼 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되었다. "말괄량이 삐삐"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시대 위대한 동화작가이자 여성아이콘으로 기억된다. 2002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사망한 후 스웨덴 정부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제정하여 매해 시상하고 있고, 2005년에는 린드그렌의 필사본을 비롯해 관련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엔딩크레딧을 계속 보게 된다. 그때 OST가 흐르는데, 가사엔 아스트리드의 인생이 담겨 있다.
뛰어올라, 용감하게 뛰어올라
어둠을 지나 빛으로
너만의 인생을 살아
즐기는 거야
너만을 위한 여름을 느껴봐
너만의 인생을 살아
앞으로 나아가
나도 내 아이가 어릴적, 세라쟈드처럼 아니 아스트리드처럼 밤마다 아이에게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알고 있는 동화가 더이상 생각나지 않으면 나중에는 말도 안 되는, 요상한 이야기들을 지어내기도 했다. 선악이 분명한 대립적 인물들을 내세워 갈등을 만들고, 위기 때마다 영웅이 나타나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들. 자라는 잠은 안 자고 점점 눈빛이 또랑또랑해진 아이가 ‘그래서!’, ‘왜?’, ‘또~’ 라는 추임새를 넣으면 더욱 신이 나 창작에 열중했었는데. 아아.... 지금 생각해 보니 아까비! 그 이야기들을 녹음이라도 해놓을걸... 그렇다고 뭐 내가 아스트리드를 꿈꾸는 건 아니고!(꿈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