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와강 Aug 02. 2024

My House, My Rules

영화 《나이브스 아웃》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때 상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안면근육이 경직되면서, 얼굴빛이 벌개진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말을 더듬기도 한다. 사실 내가 그렇다. 살다보면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내게는 그런 융통성이 없다. 사실 난 좋은 것도 못 감추고, 싫은 건 더 못 감춘다. 얼굴이 뭐 무슨 리트머스시험지도 아닌데,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 그러니 게임이나 도박 등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내가 어떤 패를 들고 있는지 얼굴에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꼴이니 말해 뭐하겠는가.      


이런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바로 포커페이스들의 잔치, 미스터리 스릴러다. 미스터리 스릴러 콘텐츠의 매력은 스토리가 끝날 때까지 “누가 범인이냐?”를 추리하며 집중하는 것이다. 등장인물 모두 다 사건을 일으킬 만한 저마다의 ‘용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아차! 하고 내가 놓친 단서로 사건이 해결될 때의 그 카타르시스! 의외의 인물이 범인인 게 밝혀졌을 때는 그 캐릭터에 배신감과 부러움이 동시에 든다. 어쩜 저렇게 표정에 변화가 없었지!      


그런데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이자 주요 용의자가, 거짓말에 역류성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게다가 영화 초반에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밝히고, 범인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영화라면? 처음부터 과감하게 거짓말 못하는 인물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면서도 끝까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유지한 영화가 있다. 바로 《나이브스 아웃》. 자신이 가진 패를 다 보여준 영화 초반의 설정은, 마치 관객들에게 그래도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고 소리치는 것 같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2019)은 라이언 존슨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다니엘 크레이그(블랑 역), 크리스 에반스(랜섬 역), 아나 데 아르마스(마르타 역)가 출연한 미국 영화다. 《나이브스 아웃 2:글래스 어니언》(2022)에 이어 3편이 2025년 개봉을 목표로 현재 캐스팅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영화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할런 트롬비가 85세 생일에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물이다. 주요 배경이 대저택이라는 한정된 공간이라는 점, 가족 모두가 결백을 주장하지만 모두에게 살해 동기가 있다는 점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고전 추리 영화가 떠오른다. 감독 역시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각본을 구상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스포일러 포함)     


할런은 미스터리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그에 걸맞게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금수저 집안답게 아들딸은 물론 손자손녀까지 할런의 등골브레이커로서 그의 돈을 축내며 기생하는 중. 그러면서도 더 많은 지원을 받고자 끝없이 할런과 부딪치며 불화를 빚고 있다. 가족들은 모두 저마다의 서사를 갖고 있어 사실 누가 범인이든 다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개연성이 있다.     


이 빌어먹을 재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가족들에게 준 것들과 베푼 일들이 녀석들의 성장을 막았을지 모른다고. 분명 그랬을 거야.      


할런은 생일날 밤, 사망 직전에 마르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녀에게 주었던 모든 지원을 끊었다는 말과 함께. 마르타는 할런의 간병인인데, 그날 할런에게 진통제 대신 모르핀을 상당량 잘못 주사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모르핀이 전신이 퍼지기 직전까지 할런은 마르타의 실수를 덮기 위해 그녀의 알리바이를 짜주고, 그녀는 그대로 실행한다. 결국 할런은 사망. 이러면 마르타가 범인.



그런데 그녀는 체질적으로 거짓말만 하면 역류성 증상을 일으켜 구토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탐정 블랑. 탐정에게 이보다 더 좋은 용의자는 없을 터. 그러나 블랑은 마르타에게 당신만이 이 죽음으로 얻을 게 없다며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탐정은 진실의 조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마르타는 탐정을 도우며 자신이 흘린 단서들을 지워나간다.     


아무런 편견없이 사실들을 관찰한 후 포물선의 경로를 밝혀내고 종착점으로 유유히 가보면 진실이 내 발 앞에 떨어집니다.      


할런의 유언장이 공개되는 날이다. 유족들은 할런이 살아있을 적엔 그의 돈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가 죽자 이제는 유산에만 관심이 있다. 가족들은 할런을 돌봐주던 마르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에콰도르, 파라과이, 브라질 등 자기 멋대로 생각할 뿐이다. 그런 마르타에게 할런의 모든 재산이 상속되자, 유족들은 유언장의 진위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한편, 마르타에게 유산을 포기하라고 협박하고 회유하기 시작한다. 결국 탐정 블랑의 활약으로 진범이 밝혀지고 사건은 해결된다.      


이건 기억해 둬요. 아주 중요한 거예요. 당신은 이겼어요. 할런의 방식으로 이긴 게 아니라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탐정 블랑이 마르타에게 한 말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유족들이 얼마나 천박하고 부도덕한 사람들인지 고스란히 노출되고, 반면 마르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밝혀지며, 관객들은 할런이 왜 그 많은 유산을 가족이 아닌 마르타에게 상속했는지 수긍하게 된다.      



영화의 첫장면에 컵 하나가 나온다. “MY HOUSE, MY RULES, MY COFFEE!!”라고 쓰인 컵. 할런의 컵이다. 내 집이니 내 룰을. 따르라는 간단명료한 선언. 영화의 마지막, 저택의 2층 발코니에 선 마르타가 범인이 체포되고 유족들이 떠나는 장면을 내려다보며 이 컵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이제 대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영화는 고전적인 추리극의 전형적인 플롯을 취하면서도 독특하고도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으로 130분 내내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2편에 이어 3편 제작까지 들어간 걸 보면 이 시리즈의 재미와 흥행은 보장된 셈이다.      



‘나이브스 아웃’, 칼을 빼어든다, 상황을 험악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영화에는 3번 이상 칼이 등장하거나 언급된다. 누가 어떤 칼을 빼어드는지, 무엇이 이 사건을 추동시키고 상황을 험악하게 만드는지 그 표면과 이면을 함께 따라가며 즐기는 것이 관전 포인트!  

 

결국 스토리는 해피엔딩, 거짓말을 못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가난한 여인의 승리로 끝난다. 미국판 권선징악, 사필귀정. 그런 걸 보면 거짓말 알레르기가 있는 내 생도 궁극적으로는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아, 거짓말에서 인생승리까지, 너무 나갔나...?!)


그나저나 더 이상 내 얼굴을 리트머스시험지로 쓰지 않으려면 포커페이스 유지하는 방법을 좀 배워둬야 할 텐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을 연구해 봐야 하나... 거참 어렵네. ♣       




* 사진 출처 : Daum 영화 정보        

이전 18화 "삐삐", 아스트리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