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인드 미 폴링》
일요일부터 우리집 냉장고가 낫 워킹이다. 이 삼복더위에 냉장고가 망가지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긴 12년이 넘었으니 바꿀 때도 됐지. 그래도 그렇지 말야, 정들었던 네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떠나버리면 남은 사람은 어쩌란 말이냐. 급하게 AS 예약하러 홈피에 들어가니 가장 빠른 게 금요일, 아니면 다음주로 넘어가야 한다. 일단 금요일 예약을 걸어놓고, 고민을 했다.
이참에 바꿔? 고친다 해도 언제 떠날지 모르는 냉장고를 불안해서 어찌 쓰겠나. 차이느니 내가 찬다. 이번엔 온라인몰에 들어가 냉장고를 검색해 봤다. 하아.... 어마무시하게 비싸군. 검색으로 눈이 벌개질 때쯤 전자회사에 다니는 지인이 생각났고, 지인찬스를 써서 썩 괜찮은 냉장고를 좋은 가격에 구매했다.
그런데! 문제는 배송. 다음주 화요일에나 배송이 가능하단다. 아... 산넘어 산! ‘삼복에 냉.장.고.없.이.열.흘.살.기. 프로젝트’인가. 뭐 어쩌겠나, 살아야지. AS 예약을 취소하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버릴 건 버리고 김냉으로 보낼 건 보내고. 냉장고를 정리하다 보니 무슨 고대 유물처럼 별 희한한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내 탐욕과 저장강박, 게으름과 무관심의 징표들! 게으름의 증거들을 뻔히 눈앞에 보면서도 난 또 게으름을 피운다. 어차피 다 버려야 하니, 급한 것만 치우고 내일 하자, 냉장고 낫워킹의 충격이 너무 컸어. 맞아맞아, 내일 하자. 빨리 냉장고 문 닫아!
생각해 보니, 에어컨이 망가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누워 영화를 고른다. 아, 천국이 따로 없군! 이 쭈굴쭈굴한 기분을 잊으려면 가장 쿨하고, 기분좋으면서, 짧고, 뻔한 것을 봐야겠어. 그렇다면 로맨틱 코미디, 좋다. 오늘밤은 너! 바로 《파인드 미 폴링》이다.
《파인드 미 폴링 Find Me Falling》(2024)은 지난달에 개봉한 따끈따근한 영화다. 스텔라나 클리리스가 감독, 해리 코닉 주니어(존 역), 아그니 스콧(시아 역), 알리 후미코 휘트니(멜리나 역)가 출연한 미국영화다. (스포일러 포함)
유명한 록스타 존은 발표한 앨범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이프러스에 집을 사고 칩거에 들어간다. 집은 바닷가 높은 절벽 위에 있어 호젓할 것 같았지만, 웬걸! 이곳이 바로 이 지역 자살명소란다. 게다가 동네가 작아 서로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사실 이곳은 존이 오래 전 왔다가 해변에서 만난 여인과 짧은 사랑을 했던 곳이다. 그 사랑을 가사로 옮겨 만든 노래가 히트하며 유명한 슈퍼스타가 됐고. 존이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건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영화는 오랜만에 사이프러스에 온 존이 그 여인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다. 그녀가 바로 ‘시아’. 시아는 홀로 존의 아이를 낳고 의학 공부를 해 의사가 되었다. 젊은 시절 존은 존대로 자신의 모든 것인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고, 시아 역시 “내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당신의 꿈을 따르긴 싫어”서 이별했다. 젊은 그들은 각자의 꿈이 사랑보다 더 중요했던 셈. 그렇다 해도 살면서 쌓이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둘은 서먹하고 삐걱댄다. 존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펜스를 치고 있을 때 시아는 존의 집을 방문한다.
- 사람들 물에 빠지는 거 막으려고 만드는 거야?
- 빠지긴, 뛰어내리는 거지.
- 그게 그거지.
- 빠지는 건 자의가 아니잖아.
- 그래서 사랑에 ‘뛰어들다’라고 안하는 거구나.
- 그래. 사랑에는 뛰어들지 않지.
하긴 그렇다. 어쩌다 보니 그사람에게 빠지게 되는 거지 지금부터 저 사람을 사랑해야지, 하고 시작하는 사랑은 없으니까. jumping과 falling의 차이. 이 영화의 제목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작은 마을에 나타난 슈퍼스타 존 때문에 마을이 발칵 뒤집히자, 시아의 딸 ‘멜리나’도 존이 자신의 아빠임을 알게 된다. 멜리나는 시아에게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모녀간의 갈등이 생긴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는 시아의 어머니는 둘을 불러놓고 모녀간의 갈등을 중재한다.
난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어.
남편과 두 아이를 묻었고
그런 일에 비하면 이건 문제도 아니야.
커피 마셔, 식는다.
내 경험을 내세워 타인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자 경험의 크기와 깊이가 다르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이나 상황도 다른데,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이렇다저렇다 얘기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저런 충고를 받을 때 참 난감하고 복잡해진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몇 시간 전 망가진 냉장고 때문에 동동거리며 짜증내던 내 모습이 갑자기 떠오르며, 사실 긴 인생 사는 데 냉장고 하나 망가진 게 뭐 대순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누군 전쟁을 두 번이나 겪고, 남편과 두 아이를 묻었다는데!
그녀는 딸 시아에게 이런 말도 한다.
- 넌 평생 쉬운 길만 택했어.
- 쉽다고요? 뭐가 쉬웠는데요, 엄마? 의대 다닌 거? 혼자 딸 키운 거? 그게 쉬웠다고요?
- 그래. 너 혼자 다 해서 하는 말이야. 넌 아무한테도 곁을 안 줬잖아. 함께 하는 고통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어. 혼자인 건 쉬워. 누구와 함께 하는 게 어렵지.
가끔은 타인과 갈등하고 조율하고 사느니 혼자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는 외롭지만 함께 살며 괴로운 것보다는 낫다. 그렇다 해도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고 혼자 다 책임지고 살아야 했던 시아의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로운 전사였을 터. 그런데 그게 쉽다니,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함께 살며 함께 사는 고통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혼자 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테니.
혼자인 건 쉬워....
이 말 때문인가, 존의 세레나데를 외면했던 시아는 결국 존의 집을 다시 찾아간다. 시아가 존을 포옹하며 하는 말.
- 뛰어들러 왔어.
- 빠져드는 게 아니고?
- 아니, 뛰어드는 게 맞아.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이제 시아는 ‘혼자’의 삶을 버리고 존과 ‘함께’하려 한다. 함께 하는 삶의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견디며, 어렵지만 더이상 외롭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냉장고 때문에 보기 시작한 영화는 내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었다.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사이프러스의 눈부신 풍경, 존과 멜리나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 거기에 용감하게 사랑에 뛰어드는 시아의 러브스토리! 영화는 이 세 가지가 잘 어우러져 기분좋은 여운을 남긴다.
그나저나 냉장고 오려면 얼마나 남았지. 아직 나흘이나 남았네. 아아... 갑자기 급격하게 치솟는 불쾌지수.... 끙! ♣
*사진 출처 : Netfl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