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민기의 노래와 젊은 날을 함께했다. 젊은 시절, 난 그의 노래에 공감하고 위로받았다. 그 노래는 내 등을 밀어주며 힘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2024년 7월, 김민기가 떠났다. 늘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던 ‘뒷것’을 잃은 슬픔. 이제 내 뒤엔 아무도 없다. 그가 떠난 날, 잠시 난 동력을 잃고 종일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를 추모했었다.
오늘, 영화 《홀드오버스 The Holdovers》를 보는데 갑자기 그의 노래 <봉우리>가 떠올랐다. 영화 제목이 ‘남겨진 자들’, ‘낙오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라서 그런가, 위의 노랫말이 입가에 맴돈다.
인용한 노래 가사처럼, 난 친구들과 등산할 때 늘 뒤처진다. 등산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날다람쥐처럼 급하게 올라가는 걸 싫어할 뿐이다. 등산은 내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한껏 해찰을 부리는 산책과 비슷하다. 난 그게 좋다. 한 발 올라설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 냄새, 풍경들. 그런 것들을 보고 느끼는 게 좋다. 내 숨이, 내 몸이 허락하는 데까지만 올라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오는 것, 그것이 내겐 등산이다.
물론 빨리 올라가 정상을 찍고 인증샷 남기는 것이 목표인 친구들도 있다. 날쌔게 올라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계속 뒤처지고 뒤처진다. 중턱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꼭대기는 얼마나 멋질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금방 잊고 또 밍기적거린다. 그러다가 어떨 땐 그냥 납작한 그루터기에 앉아 그들이 내려올 때까지 혼자 흥얼거리며 노닥거린다. 자발적 낙오! 사실 꼭대기에 올라도, 오르지 않아도 스스로 충만하다면 된 거 아닌가! 이 영화에 나온 인물들이, 낙오(?)라는 경험을 통해 인생의 더 큰 가치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 《홀드오버스 The Holdovers》는 우리나라에서 2024년, 《바튼 아카데미》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알렉산더 페인이 감독했고, 폴 지아마티(폴 허넘 역), 도미닉 세사(앵거스 털리 역)와 다바인 조이 랜돌프(메리 램 역)가 출연했다. 2024년 골든 글로브에서 폴 지아마티가 코미디 부문 남우조연상, 다바인 조이 랜돌프가 코미디 부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1970년,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아 모두가 떠난 사립기숙학교 바튼 아카데미에 각자의 사정으로 남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은 자들은 세 명. 그 중 한 사람은 폴 허넘, 이 학교 역사선생이다. 바튼 졸업생인 그는 고집불통에다 꽉 막힌 원칙주의자로 학생들은 물론 동료교사들도 기피하는 인물. 가족이 없어 연휴나 방학에도 학교 교직원 숙소에서 산다. 그는 얼마 전 바튼 출신이고 이 학교의 최대 기부자인 상원의원의 아들을 낙제시킨 일 때문에 교장과 껄끄러운 상태. 그런 그가 크리스마스 방학 2주간, 집에 가지 못해 학교에 있어야 하는 학생들의 교육과 보육을 맡았다.
두 번째는 앵거스 털리. 성적은 좋은 편이지만 친구들에게 독설을 퍼붓고 매사 공격적인 문제아다.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있고, 엄마는 새아빠와 신혼여행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남게 되었다. 자신도 아빠처럼 될까봐 두려움에 떠는 아이.
세 번째 인물은 이들의 식사를 책임질 학교 주방장 메리. 사고로 남편이 죽고 메리 혼자 아이를 키웠다. 바튼에 취직해 음식을 만들며, 자신의 아들만큼은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 바튼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미대에 가고 싶던 아들은 바튼을 졸업하고도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해 군에 징집되었고, 얼마 안 되어 전사했다. 제대 후 군보조금으로 대학에 가겠다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여인이다.
- 바튼 학생들은 베트남에 안 가. 대신 예일이나 다트머스 코넬대에 가지. 실력이 되든 안 되든.
- 커티스 램은 예외였죠.
- 커티스 램은 예외였지.
그 커티스 램이 바로 메리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바튼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다니는 귀족학교다. 바튼을 다닌 커티스가 에미의 가난과 무능 때문에 징집, 전사했다고 생각한 메리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산다.
5명으로 시작한 잔류학생들은 결국 모두 떠나고 앵거스 혼자 남게 되자 앵거스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 그러나 그러다 들키고.
- 여긴 우리 루저 둘과 저 슬픈 아줌마뿐이에요. 그러니까 쇼 그만하고 각자 알아서 지내자고요!
- 넌 벌점이야. 너 또 벌점받았다고! 어서 이리 못 와?
- 당신과 여기 있는 거 자체가 큰 벌이에요!
- 저 망할 놈이! 너 또 벌점 추가야!
이렇게 세 인물이 티격태격하면서 12월 22일부터 다음해 1월 1일까지 학교에서 지낸다. 저녁 때면 메리의 숙소에 모여 앉아 티비 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하고, 음식 재료 다듬는 걸 도와주고, 같이 밥먹고. 앵거스가 다치자 병원 가서 치료해 준다. 자신이 다친 것 때문에 폴이 불이익을 받을까 앵거스는 병원에서 폴을 아빠라고 거짓말을 한다. 폴은, 원래 바튼맨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하자고 제안한다.
- 좋아. 그럼 이건 우리 둘만의 ‘앙트레 누’야. ‘앙트레 누’가 무슨 뜻인진 아니?
- ‘위, 무슈.’ 이제 저한테 빚지신 거예요.
- 빚을 져? 날 이용해 먹을 생각마, 털리 군.
- 제가 바라는 건 고맙다는 말 한마디예요.
폴과 앵거스는 둘 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참 잘 알아본다. 우울하고 슬픈 사람들은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만큼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사람들. 크리스마스 날, 남겨진 그들 셋이 가족처럼 오붓하게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장면은 따듯함의 절정이다.
- 전 이렇게 가족 같은 분위기의 크리스마스가 처음이에요. 이런 식사가 처음이라고요. 갓 구워낸 정성스러운 요리들, 엄마는 늘 델모니코에서 배달시키거든요.
- 엄마가 잘하시는 거야.
- 내년엔 나도 거기서 시켜야지.
셋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학교 밖으로 나가 며칠간의 짧은 여행을 한다. 메리는 동생 집에 가고 폴과 앵거스는 앵거스가 가고 싶다는 보스턴에 와 같이 미술관, 서점을 둘러보고, 볼링을 치고 영화를 보며 함께 한다. 그때 앵거스는 병원에 있는 아빠를 잠깐 보고 오고.
학교로 오기 전 셋이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다. 앵거스가 다른 테이블에서 먹는 ‘체리 주빌레’를 먹고 싶다고 주문하려 하자, 종업원은 ‘체리 주빌레’에는 브랜디가 들어가서 규정상 학생에게는 팔 수 없다고 한다. 폴이 먹겠다고 하는데도 불허. 결국 체리와 아이스크림을 포장해서 나온 뒤 셋이서 주차장에서 ‘체리 주빌레’를 만들어보는데 폭망. ‘체리 주빌레’는 세 사람의 유대를 확인한 아이템이다. ‘체리 주빌레’ 만들기에 실패하면 어떤가. 그 시공간에 셋이 똑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걸 서로 알아봤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 '앙트레 누’, 이 여행 자체가 ‘앙트레 누’야
같이 밥을 먹고 비밀스러운 경험을 함께 하는 것, 곁눈질로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아니까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니 서로 다독일 수밖에 없는, 그 뻔하고 단조로운 과정이 참 따스하다. 단순히 학교에 남겨진 자들이 아니라, “가혹하고 알 수 없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된 사람끼리의 든든한 유대를 보여준 점이 좋았다.
- 대부분의 인생은 닭장의 횃대처럼 더럽고 옹색한 거야.
인생이 닭장의 횃대처럼 더럽고 옹색하면 어떠랴. 내 곁에 나와 크고작은 비밀을 공유하고, 날 이해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면 버틸만하지 않겠나. 주류에서 좀 비껴나고, 뒤에 처져 낙오되는 게 뭐 그리 대수랴. 그저 자신의 속도대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천천히 같이 가면 되지.
사립고교를 다룬 영화하면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1989)나 《여인의 향기》(1993)가 떠오른다. 그 영화들이 학생들 간의 문제를 교사 혹은 외부인이 개입하여 해결하는 스토리였다면, 이 영화는 서로 접점이 별로 없는 세 사람이 인간적인 교감을 다루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우리나라 개봉 당시 붙였던 ‘바튼 아카데미’보다 원제 ‘홀드오버스’를 쓰는 게 더 적절했다고 본다. ‘바튼 아카데미’는 영화의 주제를 담지 못하고 그저 단순한 학원물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화면 가득 펼쳐진 하얀 눈 쌓인 아름다운 캠퍼스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살짝 부족한 사람들의 따뜻한 스토리는 정서적인 충만함을 준다. 이제 매년 크리스마스엔 《나홀로 집에》가 아니라 이 영화를 꺼내 볼 것 같다. 낙오된 자들이 공유한 서로의 속사정, “앙트레 누!(비밀)” 훈훈한 영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