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여름이 가고 있다. 이럴 때 내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휴식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안하고 길게 누워 웹툰이나 영상 보기, 음악 들으며 산책하기, 좋아하는 작가의 책 쌓아놓고 읽기, 달달한 간식 먹기, 여행 가기, 친구와 맛있는 것 먹으면서 수다 떨기 등 각자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모든 걸 다 좋아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화창한 오후,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 먹을 때인 것 같다. 여행도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먹는 것도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참 중요하다.
오늘같이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얀 날, 굳이 수다떨지 않아도 마음 통하는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훌쩍 길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음식을 먹어도 행복할 것 같다.
이럴 때 보기 좋은 영화가 있다. 《아메리칸 세프》, 가볍게 힐링 또는 킬링타임용으로 보기 편한, 푸드트럭 로드무비다. 영화《아메리칸 세프》(2015)는 존 파브로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미국 영화다. 엠제이 안소니가 귀여운 아들 퍼시 역을 맡아 존 파브로와 호흡을 맞추었다.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 칼 캐스퍼는 뛰어난 요리실력에도 불구하고 오너가 아닌 탓에 메뉴 결정권을 갖지 못한한다. 그 때문에 번번이 오너와 갈등을 빚고, 오너가 정한 진부한 음식 때문에 음식평론가에게 혹평당하자 홧김에 직장을 그만둔다. 평론가는 트윗에 음식과 셰프에 대한 혹평을 올렸는데, 정작 SNS를 하지 않는 칼은 이 사실조차 모른다. 수근대는 직원들 때문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칼은 10살짜리 아들 퍼시에게 SNS 계정 만드는 법을 배운다.
칼이 평론가 글에 감정적인 답글을 달고, 그것이 회자되면서 이슈가 되자 어떤 레스토랑도 그를 원하지 않는다. 결국 같이 근무했던 마틴, 아들 퍼시와 함께 푸드트럭을 몰고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쿠바 샌드위치를 팔아 대박을 치게 되는 게 스토리가 전부다. 칼과 마틴은 요리를, 아들 퍼시는 SNS에 사진과 위치를 올리며 마케팅을 한다.
영화는 군더더기 없는, 짧고 정직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다. 식재료들의 화려한 색감에 음식 만드는 과정의 시각적 매혹이 더해지고, 이동하는 도시 풍경의 아름다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부자의 정 등이 어우러져 나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보게 되는 영화다. 마지막에 평론가와 화해하고 그의 지원으로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열게 되는 결말까지, 뻔하지만 내심 예상하고 기대했던 바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중간에 아들이 아빠에게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 주고 사용법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그때 아들 퍼시는 칼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 진짜 좋은 거 같아.
- 뭐 하는 거?
- 아빠랑 노는 거.
- 우리 맨날 놀잖아.
- 아니, 뭐라도 하면서 노는 거.
- 평소에도 하잖아.
- 아니, 뭘 보거나 하는 거 말고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서로한테 배우는 거.
- 넌 엄마 집에 있고 아빤 매일 바쁘니까 나가서 노는 거 좋아할 줄 알았지.
- 난 이게 재밌어, 뭘 알아가는 거. 아빠랑 같이 살 때처럼.
- 나도 그때가 그리워
칼은 이혼 후 2주에 한번씩 아들을 본다. 그때마다 아들을 데리고 바쁜 시간을 쪼개 놀이공원에 가 같이 놀아줬지만 정작 아들이 원한 건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그냥 같이 살 때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서로가 잘하는 것을 서로에게 가르쳐주는 일들. 아빠는 자신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고, 자신은 아빠에게 SNS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을 상대가 원할 것'이라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가끔 잘못된 호의를 베풀 때가 있는 것 같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체, 내 마음대로 상대의 생각을 가늠하고, 그게 사실인 양 판단하는 일. 나 역시 그래왔을 것이다. 10살짜리 꼬마한테 나도 배운다. 이제 무엇이든 내 맘대로 결정하지 말고 상대에게 물어보자. 무엇이 좋은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구체적으로 말이다.
영화를 보며 생각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살다 보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다. 열심히 해도,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내 탓일 수도 있고, 타인이나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 타이밍이 안 좋을 수도 있고 그저 운이 나쁠 수도 있다. 그러니 일희일비하지 말자. 전화위복, 새옹지마란 말이 있지 않는가. 절망적인 상황이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백수가 된 칼이 낡은 트럭을 개조하며 새로운 삶의 문을 열었듯, 주저앉거나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살 길은 열리는 법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딱 하나 불편한 점이 있다. 영화 포스터에 "빈속으로 절대 영화 보지 말 것"이라고 쓴 게 괜한 엄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즉 영화를 본 시간이 몇 시든 뭔가를 먹어야 한다, 특히 샌드위치나 파스타가 몹시 먹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당장 친구와 약속을 잡아도 좋고, 그럴 수 없는 시간이라면 혼자 라면이라도 먹어야 할 게다. 그럼 라면? 오늘도 난 라면인 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