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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이토록 누추한데 근검절약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미경의 〈호텔 유로, 1203〉

by 바다와강


정미경의 소설 〈호텔 유로, 1203〉은 2003년 이상문학상 추천우수작으로, 그해 대상을 받은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와 끝까지 경합했던 작품이다. 2008년, 정미경은 〈밤이여, 나뉘어라〉로 결국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호텔 유로, 1203〉은 라디오 방송작가인 '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졌다. 작중 '나'는 서른 중후반의 이혼녀로, 자신의 직업과 삶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혼 후, 구청 소속 환경미화원인 엄마와 같이 살고 있지만, 쓸데없이 성실하기만 한 엄마의 삶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엄마 역시 딸이 주제도 모른 채 월급을 쏟아붓고, 카드를 돌려막아 명품을 사들이는 걸 보며 기막혀 하는 건 마찬가지다.


여자 공부 잘해 봤자 이쁜 년 못 당하고, 예뻐 봤자 팔자 좋은 년 못 이기더라.

대체로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분량과 색깔의 불행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싫어한다. (중략) 명백하게 실패자의 편으로 분류되고만 자신의 삶에 유일한 희망이며 대안이었던 딸. 예뻤고 공부도 잘했던 딸이 자신과 닮은꼴로 되돌아왔을 때부터 엄마는 언젠가 이 따위 말로 내게 한 방 먹일 순간을 찾아왔을 것이다.


작중인물 '나'의 삶은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엄마 말대로 사나운 '팔자' 때문인가. 라디오 방송작가는 진행자의 멘트를 써주는 직업이다. 애써 쓴 글을 진행자가 마치 자신의 생각과 언어인 듯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 글을 저렇게 입에 착 붙게 잘 전달하는 진행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면 그만일 터. 그러나 '나'는 그 진행자의 모든 것을 질투하고 욕망하고 모방하기 시작한다.


최근 UNIST 정동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타인의 선택이라는 사회적 정보를 '휴리스틱 전략'을 통해 개인의 의사결정에 반영한다고 한다. 휴리스틱이란 시간이나 정보가 불충분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거나 굳이 합리적 판단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신속하고 용이하게 사용하는 추론 방식을 말한다. 즉 사람은 개인 선호를 반영한 가치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남의 선택을 모방하는 지름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시간이나 정보가 불충분해 타인의 선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을 상실하고, 열등의식에 빠진 그녀는 쉽게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물질적 소유욕에 집착하며 스스로 파탄의 길로 걸어간 것 것이다.

무수한 갈망과 후회와 매혹과 뼈저린 반성 사이를 오가며 끝내 내 것이 되고 말았던 것들. 내 존재가 수수깡처럼 느껴지는 그 지점, 윤미예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이윽고 눈물겨워지고, 슬퍼지고, 타인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내 영혼의 조각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바라보며 걸쳐보며 위로받는다. 생이 이토록 누추한데 거기다 근검절약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윤미예는 '나'가 방송원고를 맡고 있는 음악 프로의 진행자이다. 내가 써준 멘트를, 쓴 사람조차 놀랄 정도로 가슴에 와서 턱 얹히게 말하는 목소리를 갖고 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질투하면서도 사랑한다. 내가 질투하고 욕망하는 건 윤미예의 목소리뿐만 아니다. 그녀가 소유한 물건과 옷에 대한 집착은 이미 광적인 수준으로 치닫는다. 탤런트인 윤미예는 나와는 나이와 재력, 미모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녀에 대한 선망은 결국 스스로를 윤미예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극단적인 열등의식을 명품에 대한 욕망으로 대체, 명품 중독에 빠진 나. 나는 물질이 줄 수 있는 즉각적이고 강렬한 즐거움에 매혹당한 인물이다. 즉물적인 행복감은 일상의 남루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


전형적인 파노폴리 효과(effect de panopile). 파노폴리 효과는 1980년대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소개한 개념으로, 특정 제품을 소비하면 자신 역시 유사한 급의 제품을 소비하는 특정 집단과 같아진다는 환상을 갖게 되는 현상이다. 제품 자체에서 만족을 찾기보다는 제품이 갖는 이미지로부터 만족과 위안을 얻는 것을 말한다. 백화점 명품매장에 오픈런이 생기는 이유다.


결혼이란 환불이 매우 까다로운 쇼핑일 뿐이야.


철저히 자본주의적 인물인 '나'에게도 진심으로 다가와 결혼하자고 한 남자가 있었다. 시를 쓰는 그는 자본주의적 기호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사람. '나'의 모녀가 그렇듯,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법. 그녀는 결혼조차 쇼핑일 뿐이라며 그를 외면한다.


결국 타인에 대한 '나'의 질투는 욕망을 낳고,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모방은 끝내 절도와 매춘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달 말까지 카드 대금을 납입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걸 알면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소유욕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나'. '나'는 ‘누추한 생’에 대한 불만족을 명품으로 보상받으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거짓 위안이며 환각일 뿐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기자신까지 상품으로 팔아버리는 위험한 선택을 하고 만다.


정미경의 〈호텔 유로, 1203〉은 당시 심사위원들은 물론 많은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았던 작품이다. 작가는 신선하고 세련된 화법과 앙칼진 표현으로 모든 것이 상품화된 이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20년 전 작품이지만 아직도 유효한 가치관을 담보하고 있기에 일독을 권한다.


생이 이토록 누추한데 거기다 근검절약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물론 소설의 문맥 안에서, 소설의 캐릭터라면 충분히 발화할 수 있는 문장이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이 아무리 누추하다 해도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끼고 안 쓰는 게 몸에 밴 부모님의 삶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욱! 무언가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왜? 누구를 위해? 가족? 이러고 아둥바둥 안달복달 살아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뻔히 보이는 현재를 저당잡히자고? 그럴 때 플렉스가 시작된다.


물론 나도 살면서 위의 문장을 외칠 때가 종종 있다. 음... 내 플렉스는 소설 속 그녀와 좀... 많이 다르다. 소소하고 쪼잔하다. 그중 몆 개를 예로 들자면, 달걀은 항상 동물복지 유정란 1번만을 고집할 때, 화장실의 휴지는 최고급으로, 이미 책상 서랍 안에 가득차 있는 포스트잇과 펜, 수첩, 스티커 '나부랑이'(이건 이런 나를 비난하는 누군가의 워딩이다)를 사고 또 살 때다. 그뿐이랴. 가끔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산 후에도 돌아서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이렇게 외치고 만다.


"여기 순대도 1인분 주세요!"


흥! 생이 이토록 춥고 누추한데 근검절약까지 할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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