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의 〈도망가자〉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 선우정아의 〈도망가자〉(2019) 중에서
한 주의 일과를 모두 끝낸 저녁,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그냥 앉아 있다. 배고프고, 지치고, 피곤하다. 씻어야 하는데, 뭐 좀 먹어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다. 한참을 그냥 가만히 있는다. 그저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릴 뿐이다. 이때 내 입가에 맴도는 노래 하나.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혼잣말인 것처럼, 실수처럼 흘러나오는 단어. "도망가자."
정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다.
이문구의 소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2000)처럼 난 요즘 너무 오래 서있거나 달려왔다. 좀 쉬어야겠다. 쉬고 싶다.
"도망가자."
이때 누군가가 이렇게 내 귀에 속삭인다면 난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미련없이 짐을 챙길 것 같다. 짐은 무슨! 그냥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 따라나설 것 같다. 어디든 상관없다. 아니아니. 이왕이면 그 '어디든'이 바다였으면 좋겠다. 동해라면 더 좋을 듯. 언제 봐도 포말이 풍성한 고성의 봉포 바다였으면.
내비게이션을 보니, 봉포 해변까지 224km. 지금 떠나면 새벽 1시 15분쯤 도착한단다. 3시간이면 난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깊고 검푸른 바다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거대한 바다는 그 앞에 선 내 존재를 한없이 작게 만들 것이고, 먼지 한 톨처럼 작아진 나의 고민들이란 그보다 더 쪼꼬말 터. 티끌보다 작은 고민들은 작은 콧바람에도 호로록 날아갈 게다.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바닷바람이 차다 싶으면 늦게까지 문을 연 허름한 밥집에 들어가면 된다. 찬 소주를 벗삼아 헛헛한 뱃속을 채우면 세상 모든 것이 나른해질 게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뒹굴뒹굴, 자다깨다 하다 보면 내 삶도 리셋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도망가자.
세상은 나 없어도 잘 굴러간다. 잠시 멈춰서도 된다. 멈춰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지 않은가. 도망가자. 정말 그러고 싶다. 그 행복한 도망길에 "너랑 있을게, 이렇게"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너랑 있을게 이렇게
연인에게 매일매일 해주고 싶은, 매순간 듣고 싶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말이 아닐까. 매혹적이고 달콤한 워딩. 거기다가 "너라서 나는 충분해"라니... 두려울 게 없으리라.
하지만 혼자면 어떠랴. 내 절친 아이패드와 텀블러를 옆구리에 끼고 나서면 나도 뭐 남부러울 게 없다. 그.렇.다.면! 정말 갈까, 도망갈까... 하아, 224km. 내비를 보니 그동안 10분이 줄어 2시간 50분. 아아~ 머릿속으로 동해까지 너무 많이 왔다갔다 시뮬레이션을 했나, 급피곤쓰... 도망은 무슨, 얼른 씻고 자야겠다. 끙! ♣
◎ 난 적어도 이 노래만큼은 아무도, 절대로 선우정아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김범수의 노래를 듣고, 세상엔 '아무도', '절대로'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정아 역시 김범수가 노래하는 영상에 "오늘부터 이 곡은 제 곡이 아닙니다."라고 댓글을 달았을 정도니 말해 뭐해. 두 레전드 보컬의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모쪼록, 어.디.든.도.망.가.시.길!
https://youtu.be/wyN27QpglGE?si=5PoMKQe_swmy_FV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