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쁜 날들은 갔어 / 그래도 널 사랑해

도종환의 〈어떤 꽃나무〉

by 바다와강


이쁜 날들은 갔어

그래도 널 사랑해

네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아니까

― 〈어떤 꽃나무〉 전문


〈어떤 꽃나무〉는 우리에게 〈접시꽃 당신〉으로 익숙한 도종환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창비, 2024)에 실렸다. 4행의 시 구절과 그 사이사이에 빈 칸이 있는 짧은 시다. 구절마다 한 행씩 빈 칸을 넣은 것은 아마 이 시를 천천히 읽어보라는 시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시 구절보다 행간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텅빈 행간은 멀고먼 과거의 시간들을 호출해 우리 앞에 정렬해 놓는다.


이쁜 날들은 갔어... 그래도 널 사랑해... 네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아니까...


천천히 지나간 시절을 곱씹으면서, 네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네 가지에서 뻗어나온 잎이 얼마나 멋지고 화려했는지를 되새겨보라는 것 같다. 시간은 무정하고,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인간만이 지나쳐 왔던 시간을 돌아볼 뿐이다. 그렇게 돌아보면 내가 이 우주에 한 톨의 씨로 날아와 싹을 틔우고 어린 가지를 뻗어 자라며 꽃을 피워낸 그 시간들이, 그 모든 것이 정녕 꿈인가 싶다.


나.는.어.떤.꽃.나.무.였.을.까.


내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솜털 보송보송하던 시절부터 몇 십년 간 같은 시간을 살아온 이들. 그들은 스무살의 내가 얼마나 무성한 나뭇잎들을 피워 올렸는지 안다. 나의 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향기가 얼마나 아찔했는지, 질투하며 바라봤던 시절도 있었으리라.


내가 누구를 만나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누구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어느 비오는 날 밤, 술집 뒷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취한 내 등을 두드리며 함께 울어주기도 했으리라. 물론 나 역시 그들이 어떤 꽃나무였는지,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그 탄생과 성장의 역사를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서로의 가지 어느 곳에 어떤 옹이가 있는지, 그 옹이가 왜 생겼는지도 속속들이 아는 사이가 되었다.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는 건 존엄한 일이다. 돌아가며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아이들이 자라는 걸 함께 지켜보다가, 이제는 성인이 된 그 아이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는 중이다. 삶의 환희와 고독이 유행처럼 우리에게 퍼져나갔고 공유되었다. 그런 희노애락의 시간과 경험을 함께한 자들을 가리켜 가족 혹은 친구라 부르는 것이 아닐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중에서


예쁜 꽃나무였던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끝내 꺾이지 않고, 뿌리가 뽑히지도 않은 채 여기까지 왔다. 정말 장한 일이다. 살아온 것이 기적 같다. 그저 내가 뿌리내린 그 자리에서, 타고난 나만의 빛깔과 향기로..., 어? 써놓고 보니 좀 이상하다. 앗, 이건 박노해의 시다.


자신이 뿌리내린 그 자리에서
자신이 타고난 그 빛깔과 향기로
꽃은 서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자기만의 최선을 다해 피어난다

― 박노해의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중에서


물론 우리의 이쁜 시절은 갔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한때 꽃이었고, "자기만의 최선을 다해 피어"났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서로가 기억한다. 그 기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서로의 존재증명일 것이다. 우린 그때 참, 서로 예뻤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시가 하나 더 있다. 김용택의 시.


간절하면
가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꽃이 되리

― 김용택의 〈꽃 한 송이〉 중에서


"열렬한 것들은 꽃이 되리"

마음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이든 일이든, 그 어떤 것에 열렬했던 한때가 사실은 우리의 화.양.연.화.였구나 싶다.


2월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 바로 '봄'. 누가 호루라기를 들고 "자, 이제부터 봄 시작!"이라고 외치는 건 아니지만, 내게 3월은 봄과 동의어다. 이제 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고 연하디연한 연둣빛 새싹이 솟아날 것이다. 그것들은 자라나 무성하고 열렬해질 것이다. 한번 꽃나무는 영원한 꽃나무. 자신만의 속도로 각자의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그런 너를 난 또 이렇게 한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리겠지.


이쁜 날들은 갔어.

그래도 널 사랑해.

네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아니까,

넌 너의 계절에 맞는

작은 꽃을 피워낼 테고

난 또다시

새롭게 널 이뻐할 거야. ♣





* 그림 색칠 : 황문규(88세)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