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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나희덕의 〈푸른 밤〉

by 바다와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나희덕의 〈푸른 밤〉 전문


요며칠 봄 같지 않게 춥고 쌀쌀해 겨울이 다시 온 듯하더니, 오늘 오후는 다시 봄이다. 햇살이 순해지고 하늘이 맑다. 하긴 계절의 오고감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아무리 겨울이 발버둥쳐도 어쩔 수 없다. Hey, 겨울! 이제 너의 시간은 끝났어!


이맘 때쯤 생각나는 시가 있다.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 뿌리로부터 밀고 들이박으면서 올라오는 계절의, 시간의, 생명의 힘.


(상략)
밀고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4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 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어쩔 수 없는 것, 막을 수 없는 것이 비단 계절뿐이랴. 사랑도 그렇다. 미움은 감출 수 있어도 사랑을 감추긴 어렵다. 복수와 증오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몇 십년을 꽁꽁 숨겨 싸안을 수 있지만, 사랑은 향낭처럼, 재채기처럼 아무때나 흘러나와 숨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희덕의 〈푸른 밤〉은 이미 한껏 차올라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자 연서이다. 온 우주가 사랑의 기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 느낌.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살다 보면 도망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먼 길을 에둘러 돌아가고 멀어지려 해도 강력한 구심력에 이끌려 종국엔 다가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인체의 눈은 모든 것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시선은 철저히 마음을 따른다. 마음이 없거나 불편하면 눈길을 피한다. 눈치, 눈총, 눈독.... 시선을 따라가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모여 있어도 내 눈엔 오직 내 마음에 있는 사람만이 들어온다. 너는 자체 발광의 빛으로 내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다.


귀 역시 마찬가지다. 열려진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만 같은 귀도 결국엔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나팔처럼 환하게 열어젖힌 내 귀는 오직 한 사람, 너의 목소리만 받아들인다. 이런 감정을 담은, (내 생각엔) 다소 주술적인 노래도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 보려 하는데도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 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델리 스파이스의 〈챠우챠우-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 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1997)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내 응시와 한숨과 입김은 모두 너를 향한 것이다. 별과 꽃 역시 너를 위해, 너를 항해, 네 곁에 존재한다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 상상인가.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사랑은 봄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알 수 없는 건 사람의 마음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마음이다. 하루에도 수만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건 순전히 너에 대한 내 바람 때문이다. 헛된 기대 때문이다.


너는 아무 잘못 없다. 내 마음이 커다란 성을 세웠다 부쉈다, 넓은 들판을 이리저리 달리다가 나 혼자 넘어져 삐죽대는 것뿐. 때로는 환희를, 때로는 치욕을 주는 너를 난 결코 미워할 수 없다.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 속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그곳에 두레박을 드리우는 건 내 마음이다. 행여 한 모금의 물이라도 길어올릴 수 있을까, 하는 내 욕망 때문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답.정.너!

돌고 돌아도 결.국.엔. '너'.

끝.끝.내. '너'.

내 생애는 온통 '너'.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이런 시를 읽다 보면 내게도 그런 맹목의 사랑이,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

...있었겠지.

나도 경주마처럼 '너'에게로 질주하던 한때가 있었으리라.

나도 한때 푸르고 시리게 아름다웠으리라.

그리워라, 지난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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