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다

― 김기태의 〈팍토 아토미카〉

by 바다와강


누구도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 파괴다.


김기태의 소설 〈팍스 아토미카〉는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에 발표한 후 그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에 수록된 단편소설이다. 2024년 이상문학상 우수작이었던 이 소설은 강박과 불안 장애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마침내 그 불안을 잠재울, 잠깐의 위태로운 평화와 마주친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중략) 내가 문을 닫았나.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중략) 내가 정말 문을 닫았나.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중략) 그런데 내가 정말 문을 닫았나.

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중략)
"나는 문을 닫았다." (pp.267-270)


소설은 시작부터 장장 4쪽에 걸쳐 자신이 현관문을 닫았는지 여부대해 아주 길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마치 산문시를 읽는 느낌이다. 그 이후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끝없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아하, 강박증상이 엄청 심한 사람이구만", 하고 가볍게 치부할 수 있겠지만, 난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쓴 것만 같아 섬뜩했었다. 나 역시 그렇다. 가스불을 잠갔는지, 드라이어 코드를 빼놓았는지, 창문을 닫았는지 수시로 의심이 들고,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그 의심들은 강렬한 불안과 함께 끝없이 자가증식해 날 괴롭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방금 내 눈으로 확인하고도 잠시 후 또 의심하기도 한다. 이런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불안이 내 영혼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내가 생각한 해법은 내가 방금 한 행동을 소리내어 말하는 거다. "창문 닫았다!", "문 잠갔어!", "약 먹었다!" 등등 내 행동을 목소리로 발화하고, 내 눈과 귀로 교차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면 그 짧은 순간이나마 좀 편안해진다. 노화 때문인지 가뜩이나 혼잣말이 늘었는데 이렇게 주문까지 외우느라 하루종일 난 중얼대느라 바쁘다.


이렇게 자신의 행위와 상태에 대해 지속적인 불안과 의심을 느끼고 그것을 통제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안정성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고, 예측 가능하고 규칙적인 일상이 반복된다는 안도. 내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주는 확고한 평화와 안정성. 사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상태가 아닐까.


현관문만 문제였던 게 아니다. 닫힘과 열림, 잠김과 풀림, 있음과 없음, 연결됨과 끊김의 개념이 적용되는 모든 사물이 신경쓰였다. 창문, 냉장고, 수도꼭지, 가스 밸브, 병뚜껑, 신분증, 비상금, 배터리, 전화기, 각종 가전제품, 특히 광열 기구의 전원 코드…… 말하자면 전부. 아니다. '거의 전부'는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거의 전부는 전부를 재촉한다. (p. 272.)


나는 조금 이상해짐으로써 아주 이상해짐을 막기로 했다


주인공 역시 나처럼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나 상태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걸로 불안을 잠재우려고 노력한다. "조금 이상해짐으로써 아주 이상해짐을 막기"(p.279) 위해서다. 결국 그는 모든 주문을 대체하는 마지막 주문, '결정적 주문'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것만이 자신의 '고장난 핵이 유발하는 지속적인 긴장과 불안과 회의에 대한 종전 선언'일 테니 말이다.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라 부르기도 한다. (p.292)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평화는 사랑에도 적용된다. 사랑은 감정적 소모가 큰 행위다. 오죽 하면 요즘 청년들은 사랑하느니 '덕질'을 하겠다고 하는가. 타인의 마음을 얻겠다고 감정소모할 필요없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을 일도 없고, 적은 돈 쓰고나서도 큰 만족을 얻는 '덕질'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서로의 마음을 향한 고도의 지능전, 전쟁 같은 이 심리상태를 어떤 전략과 전술로 다스릴 것인지가 관건이다. 사랑이 늘 평화로울 수는 없다. 선의가 언제든지 비난이나 공격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불안, 서로가 상처주거나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매순간 견제하고 확인해야 하는 초긴장의 상태,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는 상대와 나뿐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다른 목소리들과의 위태로운 평화협정일지도 모르겠다. 언제 어떤 것이 쾅! 하고 터질지 모르지만 아슬아슬 공포의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것, 사랑도 삶도 상호확증파괴의 연속이다.


하지만 나는 원래의 목적지를 잊었다. 눈앞에 활주로가 있다. 그 아스팔트와 잔디의 인공 들판을 달리면 나의 몸이 공중의 일부가 될까. 항공권이나 비자 카드나 와이파이 발신기가 데려가는 곳보다 멀리 갈 수 있을까. 나는 가장 먼저 깊은 밤의 문 앞으로 간다. 나는 문을 닫지 않는다. 문을 열지도 않는다. 나는 문을 없앤다. 문도 문틀도, 그것들을 지지하는 벽과 기둥도 없애버린다. 모두 사라진 곳에 활주로가 나타난다. (중략)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
이것은 아무 결심도 아니지만 한번 더 말한다.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 (p.299)


작품의 마지막, 어디론가 떠나려던 주인공은 갑자기 기체 결함으로 인해 비행기가 착륙하자 비상 탈출한 뒤 넓은 활주로에 서 있게 된다. 이 우연한 경험은 상당히 큰 반전을 가져온다. 즉 소설의 첫장면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 깊은 밤 문 앞에서 벌어졌던 자신과의 싸움이 활주로에 서있는 새로운 경험으로 일시에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열림과 닫힘이 없는 곳, 불안도 안정도 없는 곳, 집착도 해방도 없는 상태야말로 주인공이 강박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자유를 얻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뒤죽박죽, 와글와글, 결국은 한데 존재한다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뒤죽박죽, 와글와글, 결국은 한데 존재한다”는 것이 9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안기는 ‘인터내셔널한’ 감각이다. 그들 각자가 생의 어느 국면에 서 있든 간에 “좋거나 싫거나 삶은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가능성”을 믿는 작가는 언제나 시간의 지속을 담보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 〈[인터뷰] 혼란 앞에 정직해지기 위해 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소설가 김기태〉 중에서


맞다. "좋거나 싫거나 삶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순간 위태로운(Atomica) 균형의 '평화(Pax)'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는 안정이 아니라 너무 두려워서 꼼짝할 수 없는 어정쩡한 평화라 할지라도, 깊은 밤, 잠에서 깨어 현관 문 앞에 서 있지 않을 수 있다면, 문단속을 잊고 잠들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문 단속을 잊고, 문의 존재도 잊고, 열림도 닫힘도, 불안도 두려움도 없는 상태, 벽도 기둥도 없이 넓고 탁 트인 활주로만 존재하는 곳, 가능하다면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싶다. ♣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