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의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전문
이병률의 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을 읽은 적이 언제였던가. 그게 언제였든 간에 맨처음 이 시의 제목을 봤을 때 받았던 낯선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모두 에고를 숨긴 채 페르소나만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한 세상에, 갑자기 숨김도 꾸밈도 없어 선전포고하듯 자신의 속엣말을 만천하에 내걸다니! '이토록'이라는 부사를 제목에 쓸 정도로 시인은 무언가를 간절히 희구하거나 누군가에게 눈이 먼, 용감한 바보가 아닐까.
시집 출간 제안을 받고 바로 눈 내리는 곳으로 떠났다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돌아올 날이 지도록 눈 속에 남았다
그때 와락 스치듯 떠오른 것이 이 시집의 제목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냄새를 맡았는데 맡는 중이었음에도 눈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시는 그런 것
사랑은 그런 것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에 실린 〈시인의 말〉 중에서
그래서인가,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문학과지성사, 2024)에 실린 시, 69편의 공통 주제는 '사랑'인 듯싶다.
시인의 사랑은 연인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하며 새롭게 마주한 '자신'을 향해 있다. 낯설고도 매혹적인, 비겁하면서도 졸렬한 '자신'에 대한 발견. 사랑이 '나'를 얼마나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내가 사랑 전후로 어떻게 변화하고 미쳐갈 수 있는지, 시인은 거울을 보듯 꼼꼼하게 중계한다.
사랑이 끝나면
말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 되어 미쳐 다닌다
― 〈과녁〉 중에서
사랑할 때는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까지 떠올리지만, 사랑이 끝난 후에는 "쓰레기보다 더한 쓰레기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사랑 전후 우리가 하는 건 그리워하는 일이다. 그리움이 끝난 자리에 우린 대체로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하곤 한다. 상대의 성격과 언행을 하나하나 곱씹고 따지고 평가절하하며, 그(그녀)가 이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랬어, 그게 문제지, 우린 안 맞아, 헤어지는 게 당연해, 등등 남탓하며 이별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과 이별 전후 자신을 들여다본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 쓰레기 같은 인간과 사랑을 했구나 하고 화들짝 놀"라지만, 바로 "사랑을 하면 할수록 / 쓰레기보다 더한 쓰레기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사실 사랑이 끝났다고 떠난 상대를 쓰레기라고 부르기도 쉽진 않겠지만, 그보다 어려운 건 자신을 상대보다 더한 쓰레기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쓰레기가 되든, 쓰레기가 되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이번 생의 비밀을 풀 암호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개인적입니다
사랑을 감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번 생의 암호를 풀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러고 삽니까
사랑이 후방에라도 있는 겁니까
― 〈언젠가는 알게 될 모두의 것들〉 중에서
시인의 시를 읽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나?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었나? 음... 있었을 게다. 젊었을 때는 매번 그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열렬히 사랑했을 거다.
또 이런 생각도 한다. 대체로 "~한 적"에 관한 것들. '적'은 '그 동작이 진행되거나 그 상태가 나타나 있는 때, 또는 지나간 어떤 때'를 가리키는 의존명사다. 보통 용언의 관형사형 어미 ‘-은’ 이나 명사 뒤에 쓰여, 지나간 과거의 그때를 나타낸다. 시인의 시에서 반복되는 '~한 적' 역시 '어느 한 때', 혹은 '시절'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살아오면서 나는 "~한 적"이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니 늘 "~한 적"투성이였네.
내가 가진 걸 모두 다 주고 또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 적
어떤 한 가지에 열렬히 집중한 적
잠을 못 잘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한 적
질투 때문에 치졸해진 적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미치도록 기다린 적
운전하면서 울어본 적
술 마시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 노래한 적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적
망설이다가 후회한 적
울다가 잠든 적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다가 결국 괜찮아진 적
글을 맺기 전에 한 가지. 한 가지 털어놓을 게 있다. 솔직히 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제목을 오독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을 자꾸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죄"로 읽는다는 것! 사랑을 왜 '죄'와 연관시키냐고 묻지 마라.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고 "사랑이 죄인가요?"라는 유행가를 너무 많이 주워 들어서인가. '~사랑한 적'이라는 원제를 읽을 때 느끼는 지고지순하고 고고한 열정이 '~사랑한 죄'로 오독하는 순간 불결한 로맨스로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대체 난 왜 자꾸 오독하는 건지, 하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