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문화공간은 필요한가?

상처가 아무는 도시

by jwk

깨끗한 신도시의 넓은 차선 옆 매끈한 인도를 걷는 것과 익선동의 낡고 좁은 골목길을 걷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현대의 도시는 치밀한 계획과 효율성에 의해 탄생한다. 고층 빌딩과 최적의 동선을 고려한 지하철 노선까지, 우리가 사는 도시는 어쩌면 완벽한 기계를 디자인하듯 만들어진다. 하지만 디자인만 된 도시는 ‘완벽히 박제된 표본’ 일뿐이다. 정교하게 구획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진짜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도시는 생명체여야 한다. 생명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부딪히면 흔적이 남고, 상처도 생기고, 상처가 아물기도 한다. 땀을 흘리기도 하며 끊임없이 외부와 호흡하며 스스로를 진화시킨다.


만약 도시가 오로지 효율과 기능으로만 점철되어 있다면 이런 생명력은 생기지 않는다. 도시가 생명력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교한 콘크리트 타설이 아니라, 그 사이를 흐르는 도시의 맥락과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숨결이다.


- 배수가 아닌 '흐름'을 만드는 곡선의 도시


인위적으로 조성된 도심 속 하천은 관리하기 쉽고 보기에는 깔끔하다. 하지만 자연이 만든 강이나 하천에 비해 이런 구조는 '흐름'이라기보다 '배수'에 가깝다. 물을 빨리 내버리기 위한 목적에 충실할 뿐, 그 안에서 생명이 자라나긴 힘들다. 자연이 만든 강과 하천은 직선으로 만 흐르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 굽이치며 스스로 속도를 조절한다. 바로 이 굽이치는 지점에서 물살은 느려지고, 영양분이 쌓이며, 비로소 온갖 생명이 깃드는 생태계가 형성된다.


- 생명력 있는 도시의 상처, 문화공간


도시의 맥락에서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문화공간이다. 문화공간은 효율성이라는 직선의 속도에 제동을 거는 '전환의 스팟'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도시인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예상치 못한 자극과 마주하게 하며, 삶의 방향을 비트는 변곡점을 제공한다. 이 지점에서 도시의 산소 공급이 시작되고, 사람과 사람이 섞이며 도시라는 생명체의 피가 비로소 순환하기 시작한다. 도시가 숨을 쉬기 위해서는 일상 속에 스며든 변곡점들이 더 절실하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그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창작해 나갈 수 있는 곳들 말이다. 그곳은 때로 누군가의 작업실이 되고, 누군가에겐 철학적인 사색의 의자가 되며, 낯선 타인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광장이 된다.


이런 역할은 랜드마크적인 대형 문화시설만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 또 대형 문화시설이 만든 큰 상처는 아물고 자연스러워지는데 훨씬 오래 걸린다. 길모퉁이의 작은 갤러리, 퇴근길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거리의 공연, 아이들이 생애 첫 디자인을 해보는 커뮤니티 센터, 동네 작은 서점, 공원의 편안한 벤치, 대형 빌딩 1층의 로비와 공원 같은 '일상의 작은 문화공간'들처럼 작고 가벼운 상처들은 훨씬 자연스러운 도시를 만들어 도시의 실핏줄을 만들어 낸다.


꽤 오래전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계획 프로젝트에 문화전략 수립 컨설팅에 참여했었다. 회의를 하다 보면, 문화공간이 들어가야 할 위치와 상업, 주거시설을 계획하는 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팟이 거의 일치한다. 상업시설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그 위치에 유명 브랜드의 대형 매장을, 주거시설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경관 좋은 로열동을 만들고 싶어 한다.


매끈한 새로운 도시에 상처가 나는 게 싫은 수 있다. 거기에 임대가 잘되는 매장을, 잘 팔리는 아파트를 더 만들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는 아물 수 있는 상처가 필요하다. 아무런 상처가 남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에 생명력이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강물이 굽이 치는 지점은 마치 아문 상처와도 같다. 상처가 생기고 아물면 자연스러운 곡선이 된다. 익선동의 낡은 골목길은 그런 상처가 아물고 자연스러워진 곡선의 도시이다. 그 안에 쌓인 시간의 레이어가 자연스러운 곡선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도시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문화공간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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