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밭이 달아났다

by 배종영

겨울부터 여름까지 매여 있던

늙은 농부의 착한 파밭을 알고 있다.

나붓하게 자라는 단일 품종들의 텃밭은 아무리 봐도 한 마리 짐승 같다. 바람 따라 비스듬히 누웠다가 아침, 습습한 기운에도 부스스 일어나는 채소들의 생활력

밭 가운데로 함부로 길을 내지도 않아 야생이고 길을 피해 다녀서 겁 많은 짐승이다. 착한 짐승은 털끝에서도 꽃이 핀다던가. 파 꽃이 하얗게 피는 오월은 햇살을 깔고 잠자는 초식 짐승 같다.

파밭을 지나다닐 때면

보글보글 끓는 저녁이 떠오르고

파를 먹지 않는 저녁 같은 짐승들이 떠올랐다.

산 채로 잡혀 온 고라니의 털은 불안한 들숨 날숨을 쉬었다. 사람의 길에 들어서서 허둥대었을 그 발에는 길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헤매는 내내 놀란 눈으로 야생을 두리번거렸을 것이다. 그 어쩌다 잡힌 고라니를 끓일 때 마을 노인들은 파를 듬뿍 썰어 넣었다.

오늘 아침 파밭이 달아났다.

길도 없었는데 홀연히 사라졌다.

휑한 밭에서 고라니의 누린내가 나고

빈 밭에서 고라니 털들이 잡초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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