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함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끔 TV 영화 채널을 돌리다 보면 낯익은 제목이 화면을 채운다. "올리버 트위스트."
대충 보인 건 삐쩍 마른 꼬마가 초라한 옷을 입고 고된 일을 하는 모습.
어린 공장 노동자쯤으로 생각하고는,
곧 리모컨을 다른 채널로 옮기곤 했다.
이상하게도, 끝까지 볼 엄두가 안 났던 영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한 번쯤 제대로 읽어봐야지’ 하고 품어둔 책.
드디어 큰맘 먹고 일주일간 정독을 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의외였다. 올리버는 공장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는 구빈원에서 생활하던 고아였다.
당시 영국의 하층민 아이들이 입던 옷이 지금 보면 공장복 같아 보였던 모양이다.
덕분에 '아동 노동'에 대한 이야기려니 했던
내 선입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실수를 자각하는 순간, 흥미가 생겼다.
'그럼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읽는 내내 한국의 신파극 같은 정서가 느껴졌다. 출생의 비밀, 악인의 유혹,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후원자, 결국 밝혀지는 진실, 그리고 해피엔딩. 올리버는 끝내 자신이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주변의 따뜻한 사람들 품에서 행복을 찾는다.
솔직히 말하면, 이 해피엔딩이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게 착한 사람에게만 미소짓지 않는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고, 때로는 불편함 속에서 진실을 마주하게 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너무 ‘예쁜 결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라며 넘기기엔 그 속에서 깊은 질문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처음 어디에 발을 디디느냐에 따라 평생이 결정되기도 하는 걸까?”
낸시, 사익스, 찰리 베이트... 이들은 태생부터 악인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저 삶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것이다.
하필 그 시절, 그 동네, 그 시간에 페이긴을 만나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사람들. 배운 게 도둑질뿐이니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없고, 나와 같은 범죄자들 속에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구조.
결국 착한 마음 하나로는 현실이라는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올리버는 달랐다.
다행히도 ‘좋은 어른’을 만났고, 운 좋게도 손 내밀어줄 사람이 곁에 있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착하면 복을 받는다’는 메시지보단, '누군가의 첫 걸음을 지켜주는 존재가 있는가'에 더 가깝다.
책 말미, 로즈 양이 한 말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이 아이가 나쁜 아이라 해도 아직 어리잖아요. 사랑이나 따뜻한 가정을 몰랐을 수도 있어요. 학대와 굶주림에 내몰려 악당들과 한패가 된 건지도 모르지요. 너무 늦기 전에,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말처럼, 누군가에게 늦기 전에 자비를 베푸는 일, 그 첫 단추를 잘 꿰게 도와주는 일 아닐까.
그걸 알게 해준 것이 이 책의 진짜 선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무심코 돌리던 영화 채널에 “올리버 트위스트”가 나올 때, 리모컨을 잠시 내려놓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