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신앙이기보다 삶의 태도에 가까웠다
부처라는 신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게 해주는 종교. 불교란 나에게 그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다.
절에 가면 기왓장에 글을 새기면 얼마, 연등 하나에 얼마, 제사를 지내면 얼마, 기도를 하면 얼마…
이 모든 것이 상업적인 느낌을 풍겨서 딱히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부처라는 사람이, 2025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내가 돈을 바쳐 소원을 빌면 관심이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만 들었고, 종교로서 불교는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도 그 고정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삐딱한 시선으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다보니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불교는 ‘신에게 소원을 비는 종교’가 아니었다.
어쩌면 불교는 심리학에 더 가까웠다.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사고방식,
명상을 통해 잡생각을 없애는 실천들.
이것은 종교라기보다 실용적인 심리학에 가까웠다.
사실 초기 불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교단이 아니었다. 부처의 사후, 불교계에 대혼돈이 찾아왔다. 그 과정에서 규칙과 규율이 하나씩 만들어진 것이다.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고, 타국으로 전해지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뒤섞여 셀 수 없이 많은 불교의 갈래가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 역시 그 무수히 많은 갈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불교에서 인간의 고통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가르침은 지금도 여전할까?
부처는 과연 자신을 이렇게 신격화하고 추앙받길 원했을까?
왕위 계승자로 태어났으나, 그 모든 사치와 향락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허름한 옷 한 벌만 입고 출가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처럼 신으로서 숭배받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누군가의 권력과 세력을 위해 그렇게 신격화된 것은 아닌지..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욕망을 다스리고,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가르침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