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자는 t 지역에서 농사짓는 농부이다. 면 단위의 작은 단체에서는 봄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대로변과 하천을 청소하는 일이다. 봉자가 속해 있는 새마을 회원들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쓰레기를 줍기로 했다.
봉자는 오랜만에 몸빼를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겉에는 초록색 새마을 조끼를 걸쳤다. 챙 넓은 모자도 챙겼다. 산골 외딴집을 나서는데 마을 이장의 방송이 산기슭을 울렸다. 산불 조심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말은앞산 병풍바위를 넘지 못하고 돌아와서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가물대로 가물어 사람까지 건조해지는 삼 월이다. 삼월에는 산 불조심 방송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어제는 멀리 떨어진 면 지역에서 산불이 났다. 밤샘 진화에도 불구하고 낙엽 밑에 숨어 있는 잔불 발화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군인과 공무원, 주민들이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타협이란 걸 모르는 산불이 바람이라도 탄다면 속수무책이다. 놈의 만행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그리고 삭막한 폐허와 뼈저린 후회만이 우리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일기예보가 대놓고 어긋나기를 바랄 뿐이다.
봉자는 뼈아픈 산불의 기억이 있는 b 마을에 살고 있다. 그때의 산불은 전해 들은 말만으로도 충분히 아찔했다. 집을 나와 집결지인 면사무소까지 가는 데는 네 개의 마을을 지난다. 그사이에도 산불 조심 방송은 낡은 차창을 빛처럼 통과해서 귀에 박혔다.
“논밭 두렁이나 영농부산물은 절대 소각금지이며 소각하다가 발각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담뱃불을 버리면 안 됩니다. 허가 없이 입산하면 안 됩니다. 우리 고장에는 단 한 건의 산불도 없기를 다 같이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별로 하는 방송이나 차가 이동하면서 틀어놓는 산불 조심방송을 공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면사무소엔 벌써 초록색이 무리지어 있었다. 무채색의 바지에 초록색 조끼 입은 사람들은 겨울을 버티어 낸 소나무 군락같이 보였다. 사람들이 면사무소라고 하는 청사 꼭대기에는 ‘행정복지센터’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름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는 모양이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봉자의 열세 살 아들도 '행정복지센터'라도 읽고 '면사무소'라고 발음한다.
오늘의 자연보호 구역은 t 마을이다. 다른 단체에서 대로변 일부를 했고 나머지 일부는 예약이 되어있다고 했다. t 마을 이장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고 주민들의 양심에 울림을 주고 싶다고 했다. 회원들은 기꺼이 응답했다. 어디에서 쓰레기를 주운들 다를 것 없지만 이왕이면 뜻이 있는 곳에서 자연보호를 하는 것이 썩 좋았다.
동네 복판을 흐르는 하천을 접수하는 것이 오늘의 임무였다. 막 이 월을 지나 온 무채색의 하천은 들은 대로 생각한 대로였다.
희끄므리한 비닐이 물과 모래에 발목을 잡혀 펄럭였다. 무채색을 더 칙칙하게 만드는 꺼무튀튀한 비닐도 그러했다. 농부의 목을 달랬을 음료수 캔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피로를 달랬을 병들이 갈 곳을 잃어 하천에 모인 듯했다. 사람들의 안이한 흔적은 하천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속이 터져 나온 곱창 같았다.
목 높은 장화를 신고 온 회원들은 주저 없이 하천 둑을 내려갔다. 산골 마을 하천엔 역시나 돌이 많았다. 억센 풀을 뽑듯 돌 모래에 묻힌 비닐을 뽑아 올렸다.
타의로 버려진 자신을 헹구고 또 헹구었을 물속의 비닐, 병, 캔들을 주워냈다. 산골의 바람은 차가웠고 장화 속으로 전해지는 물의 온도는 더 차가웠다. 묵은 갈대는 용케도 물을 피해 모여 있었다. 해약한 허리에 영혼 없는 머리를 바람에 맡기고 있었다.
하천 둑 옆으로는 포도 하우스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포도 하우스 뒤 음습한 곳에서 강아지 소리가 들려왔다. 솜뭉치처럼 보이는 포메라니안이 묶여있었다. 누더기가 된 털을 걸친 채 황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고개만 내밀고 불안하게 짖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오게 된 강아지일 것이리라. 겨울 동안 냇바람을 견뎌 내려 얼마나 용을 썼으면 부둥켜안은 털은 골이 깊었다.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당사자의 의향과 관계없이 같이 살게 되었으리라. 강아지가 힘에 부쳤거나 좋아하지 않아서 이 음습한 곳까지 오게 되었으리라. 아니면 간혹 있는 농산물 도둑 예방 차원에서인가. 봉자의 생각이 맞는다면 강아지는 상팔자가 못 되었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주인은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시골에는 도시에서 쓰다가 가져다 놓는 물건들이 많다.
시골 어느 집이나 어느 농업 장에는 딸 표 아들 표 심지어는 사돈 표까지 꼬리표도 없는 물건이 허다하다. 최근에는 개와 고양이도 합세했다. 다행히도 인연이 닿아 좋은 반려가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날이 빨리 따뜻해지길 바랄 뿐이다. 강아지의 불안한 눈빛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단체가 하천 중반을 지날 때 즈음 t 마을 이장의 마음이 통했는지 주민 몇몇 분이 함께했다. 그분들은 물 차가운 줄 모르고 열성을 보였다.
하천은 훤칠해졌다. 며칠 후면 불미나리와 쑥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 것이다. 숨어 있던 송사리도 궁금증을 못 견딜 것이고 요즘 보기 드문 뱀도 물 먹으러 살짝 다녀 갈 것이다. 군데군데 깊이 고인 물은 농작물의 감미로운 수액이 된다. 얼마나 가물었는지 별도 목이 말라 내려앉을 것이다. 이럴 때 봄비가 오신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여럿이 하는 일은 여유가 있어 일찍 끝났다. 일이 있다고 먼저 간 회원도 있었다. 연식이 좀 되었다고 강조하는 회원은 눈총을 받았다. 감투 쓴 회원은 릴레이 계주의 바통을 받듯 쓰레기 부대만 받아주었다. 어깨에 힘줄을 다쳐 수술한 회원은 쓰레기 싫은 차를 운전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양했지만 좋은 일의 끝은 맑음이었다.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데 이렇게라도 쓰레기를 줍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했다. 봉자의 자연보호는 이번이 두 번째이다. 세 번은 해야 산수유가 필 것이다.
t 동네의 부녀회장이 마을회관으로 안내했다. 커피와 녹차를 내어 왔다. 이장 딸이 일본 여행에서 사 온 귀한 것이라고 했다. 빛깔 고운 녹차는 민망하게끔 인기가 좋지 않았다. 봉자도 얼른 손이 가지 않았으나 마지막 잔을 들었다. 예상한 대로 입에 맞지 않았다. 이장 딸이 사 온 녹차는 그날 사람을 잘 못 만난 셈이다.
봉자는 몇 년 전 그곳에서 지신밟기를 했는데 회관 옆에는 그때는 보이지 않던 집이 보였다. 큰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가재미’의 문태준 시인의 생가라고 했다. 양옥은 아니고 유럽풍도 아닌 독특한 모습이다. 문패를 보니 부모님이 사는 듯했다. 시인의 부모님은 어마어마한 인성 부자라고 이장이 말했다. 집을 기웃거리기도 조심스러워 뚝 떨어져서 보았다. 문태준 시인은 이곳에서 시심을 키웠다고 했다. 시인은 큰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고 했다. 마음이 끌렸다. 폰을 꺼내어 ‘가재미’ 시집을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 봉자는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어 보듯 한 편씩 한 편씩 꺼내어 보는 맛을 즐긴다.
회원들은 하늘이 빼꼼한 산골 마을을 걸어서 내려왔다. 차를 세워놓은 마을 입구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눈요기 귀요기는 충분히 되었다. 봉자는 집에 들어가기에 서운했다. 고향이 같은 s 마을 경옥 언니에게 탁구 한 게임 어떻냐고 물었다. 탁구를 잘 치는 경옥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오케이를 했다. 건강 생활 센터로 갔다. 경옥이 써브를 넣었다. 봉자가 받아서 쳤다. 어김없이 공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봉자가 써브를 넣으면 경옥이 살짝 넘겨주고 미리의 뻣뻣한 손목은 공을 또 허공으로 쏘았다. 구석구석으로 뛰기에 바쁜 경옥이 말했다. 겨우내 쌓인 지방을 태우는 데에는 공 줍기가 제격이라고. 경옥은 봉자에게 언제나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