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로암 Sep 13. 2024

손잡아주고 손놓아주고

아홉 살 N은 선생님이 풀라고 하는 수학시험지를 가만히 들여다봤지만 숫자와 한글을 겨우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를 풀 수 없었다. 듬성한 머릿속을 뒤적거리다가 겨우 덧셈 몇 개와 숫자 몇 개를 쓰고 나니 점수는 20점이었다. 와 20점이나 받았어. 빵점일 줄 알았는데. 그런데 친구들의 시험지를 엿보니까 다들 구름처럼 동그라미가 풍성했다. 나는 수학을 못하는구나. N은 풀이 죽어 작고 가느다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전에 살던 시골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숫자는 숨바꼭질할 때만 썼고 아무 문제없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옮긴 학교는 시골학교의 몇백 배나 컸고 아이들도 너무 많았다. 그 아이들은 다들 시험지에 동그라미를 잔뜩 받았는데 N은 그렇지 못해서 속상했다.

      

개나리가 노랗게 점을 찍는 3월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니 짧은 단발을 억지로 묶은 아이가 빨간 가방을 메고 앉아있었다. 진짜 머리 이상하다. 친구가 하나도 없을 것 같이 생긴 아이다. N은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 그림을 그렸다. N의 그림을 보러 웅성웅성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그 안에는 이상한 아이도 있었다. 

“너도 그림쟁이야?”

이상한 아이는 N의 옆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서로의 그림을 보면서 하하하 웃었다.     

수학시간이 끝나고 시무룩한 N을 보고 이상한 아이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수학이 어렵고 힘들다고 말하자 이상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 엄마 수학팔이야. 이 동네에서 수학 팔아. 책상 진짜 크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친구네 엄마가 수학을 판다는데 나도 가서 사야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번호를 알아오라고 했다. 공부는 혼자 하는 거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하던 엄마였다. 그래서 한 달만 다녀보기로 했다.     

한 달 동안 N은 나눗셈만 했다. 구구단이 잘 안 되어서 구구단표를 보고 했다. 구구단표를 보고 하면 너무 쉬우니까 안 보고 하려고 노력했는데 선생님은 뭐 하러 힘들게 하냐고 그냥 보라고 했다.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안 보고 할 수 있다고. 과연 한 달 후에는 구구단표가 없어도 나눗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물었다.

“계속 다닐 거야?”     


다음 달에는 곱셈을 했다. 두 자릿수 곱하기 두 자릿수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도저히 혼자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숫자를 어디다 써야 하는지 이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옆에서 계속 가르쳐줬고 구구단이 잘 생각나지 않으면 귀에다 대고 칠팔오십육!! 육구오십사!!!!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칠팔오십육과 육구오십사는 절대 안 까먹게 되었다. 아직도 고막이 떨리는 것 같다.


겨우 친구들과 같은 교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은 슝슝 진도를 나갔다. 친구들만큼 내게도 동그라미가 잔뜩 그려졌다.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동그라미가 내게도 있다. 5학년이 되자 선생님이 잔뜩 겁을 줬다. 5학년 수학은 어렵고 힘들고 귀찮지만 이걸 못하면 이다음 수학은 없다고 계속 계속 계속 말했다. 약수와 배수, 약분과 통분, 분수와 소수는 어려웠지만 못할 만큼 어렵진 않았다. 단원이 끝날 때 치는 시험에서 어느새 나는 90점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중학교에 가자 수학이 더 재미있어졌다. 수학점수는 시험을 칠 때마다 올랐다. 1학년때 70점대였던 수학점수는 3학년 때 90점을 넘겼다. 선생님은 N의 공부방식을 칭찬해 주었다. 모르는 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자세가 아주 훌륭하다며 크게 말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놓쳤다고 조그맣게 알려주었다. 가끔 숙제를 안 해가도 매번 숙제를 안 해오는 이상한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혼날 일이 없었다. 수학이 재미있었어도 매번 재미있을 수는 없으니까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선생님은 뺨을 때리고 등을 밟으며 나태해지는 N을 조졌다. 더 잘하는 아이와 비교하며 자존심을 깎아내렸다. 얘는 하는데 니는 못하나. 그럴 때 N는 부들부들하며 공부했다.      


이상한 아이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N의 수학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본인이 아니라도 너는 수학을 공부했을 거라고 했다. 수학을 공부하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결정된 것이고 노력하는 것 역시 타고나는 거니까 선생님이 영향을 미친 것은 극히 미미했을 거라고. 선생님이 한 일은 살짝 등을 밀어주고 손을 잡아준 것뿐이고 대부분은 너 자신이 이룬 것이니 자부심을 가지고 가슴을 쫙 펴라고 했다.   

    

그래. 

바로 내가 공부한 것이지.

물을 뿌려준 선생님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지

벌레를 잡아주고 햇빛에 내놓고 적당한 온도를 제공한 선생님이 아니라 내가 자랐지.

이제 N은 더 어렵고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흥미진진한 고등수학의 길로 간다. 

이제 선생님이 없어도 꾸역꾸역 그 힘든 길을 갈 수 있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