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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로암 Sep 20. 2024

그것은 지구력

혼자 일을 하면서 제일 좋은 것은 서류를 위한 기록, 가치관과 맞지 않는 대화, 명령과 강요, 종이의 낭비 등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럼 쓸데 있는 일은 뭐냐. 바로 내가 하는 일이다.


 학년별로 머릿속에 표를 그린다. 아이들마다 진도가 미세하게 다른데 그래도 어려워하는 부분은 비슷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학습지를 준비한다. 진도가 빨라 교재를 다 풀어버린 아이들이 할 조금 어려운 학습지도 준비한다. 3학년. 4학년. 5학년.. 차례로 올라가며 프린트기를 돌리고 돌린다. 윙윙. 그날 공부할 학습지는 그날 준비한다. 제철학습이 제일 몸에 좋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해 둔 학습지는 상하거나 곰팡이가 핀다. 흐물흐물해지며 불쾌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거무죽죽한 물이 흐르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상하거나 곰팡이가 핀 학습지는 고객님들에게 해롭다. 유통기한이 지난 수학을 애한테 먹였다며 보호자의 항의를 받을지도 모른다. 만들어둔 학습지가 있다는 것을 까먹고 다시 하는 일도 있다. 미리 준비해 둬서 시간이 남아돌 때도 있긴 한데 그러면 어쩔 줄을 모르고 집안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낸다. 그날 준비한 수학을 그날 다 팔아버리는 것이 신선하고 좋다.      


 막 잡은 신선한 개념을 덩어리째 던져줘 본다. 덩어리개념을 맞닥뜨린 여러 아이들 중 몇 명은 아무렇지 않게 우적우적 뼈까지 씹어먹기도 하고 몇 명은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겉만 핥는다. 겉만 핥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씹어먹기 편하도록 개념을 썽둥썽둥 썰어준다. 그러면 잘 먹는 아이도 있고 그래도 못 먹는 아이가 있다. 그래도 못 먹으면 더 잘게 썰어준다. 아주 얇게 살짝 들어 올리면 저너머로 공부하는 친구가 비칠 정도로 얇게 썰어줘도 못 먹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면 내가 씹어서 먹여준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도록. 그렇게라도 맛을 본 아이와 에이 씨발 더럽게 저걸 어떻게 먹어하면서 안 먹는 아이는 아주 약간의 차이가 난다. 아주 약간이라서 알아보는 사람은 적지만 맛을 본 자와 맛조차 보지 않은 자는 어쨌든 다르다.      


 덩어리를 우적우적 씹어먹을 수 있는 아이와 씹어먹여도 잘 못 먹는 아이들이 공존한다. 선천적으로 수학이 몸에 잘 받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정해진다. 이것은 절대적인 유전의 결정이다.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수학 하나만을 위해서 다른 대부분의 것의 팔과 다리를 잘라 바쳐 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것이란 그림 그리고 놀 시간, 책 읽으며 놀 시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할 시간 그리고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물질적, 자본적 에너지다. 생명은 다양성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매우 힘들어진다. 노력이란 그 한 가지를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은 종목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수학을 위해 (또는 그림을 위해, 글을 위해) 다른 종목에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몰빵 할 수 있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학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노력일 경우가 많다. 나는 그런 노력의 가치를 신뢰하지도 않고 그에게 부여된 황금관을 깨부수고 싶다. 쓸데없이 너무 많은 권위를 가진 놈이다. 그놈 때문에 인류는 지금 멸종의 위험에 처해있지 않은가. 노력하지 않는 인간을 비하하고 배척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는 아주 나쁜 녀석, 강요된 노력이다.     


 내가 신뢰하는 것은 지구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힘. 지구력. 지구력을 가진 아이들을 사랑한다. 예쁘다. 그 아이들이 진정 세계를 움직이는 실체다. 지구력 또한 선천적으로 결정되지만 관찰 결과 매일 적당한 양을 공부할 지구력 정도는 다 가지고 있는 듯하다. 수학을 씹어서 입에 넣어 줘도 먹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보려고 애쓰고, 한번 푼 문제를 다음날이 되어 까맣게 잊어먹고, 다시 풀어보고 또 틀리고 다시 풀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풀고 이 문제 포기할래 물어보면 아니오 한번 더 풀어볼래요라고 대답하는 녀석들의 아름다움과 위대함. 나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 벅차다. 그런 아이들이 받아오는 자그마한 수학점수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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