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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로암 Oct 04. 2024

고객님을 읽다

T가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일차방정식 활용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T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어린아이 대하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T는 참고 참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눈으로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4학년때는 이렇지 않았다. 친구들과 잘 놀고 눈빛도 아이다웠다. T가 변한 것은 5학년때였다. 야구하고 싶다고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에서 방학 동안 훈련을 하기로 했다며 공부방을 끊었다. 몸통이 굵고 튼튼했기 때문에 야구선수하기 좋은 몸이라고 생각했다. T의 어머니는 아들이 운동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줘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 동의.    

  

T는 두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훈련은 너무나 지독하게 힘들었고  특출 나게 잘하는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본 T의 눈 속에는 면도날 같은 것이 생겨있었다. 잘 어울리던 친구들과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고 잘 웃지 않았다. 더 이상 T는 해맑지 않았다.     

 

T와 같은 학년 아이들은 공부방의 다른 학년에 비해 전체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숙제를 잘 해오지 않았고 미친 듯이 떠들었으며 자리에 앉게 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이들은 바닥에 앉아 의자를 책상 삼아 공부하거나 책상 위에 엎드려서 문제를 풀었다. 의자에 앉아 책상에 책을 놓고 공부하는 아이를 놀렸다. 누군가 한마디 하면 꼬투리를 물고 기상천외한 문답이 계속 끊이지 않고 오고 갔다. 

-선생님 제가 이 문제 풀었어요. 쏘이지( so easy)하네요.

-easy~ 이 지랄하고 있네~

-선생님 여기서 M이 뭐예요?

-애미라니 와 패드립쩔죠?

-패드립이라니!!! M이라고!!

-오~ 급지랄이네요~

이런 식이었다. 나조차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다른 학원으로 옮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뭉쳐 다니며 잘 놀았다. 시험성적은 잘 나왔기 때문에 부모님들도 만족하셨다. 이 학년을 가르치는 것은 즐겁고 유쾌했다. 그 속에서 T는 눈에 면도날을 숨기고 수학을 공부했다.  

    

위험해 보이는 이 녀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난감했다. 시끄러운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진도는 아이들보다 느렸다.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교과서를 5번 풀 때 T는 조용히 2번 풀었다. 머리가 아파 자주 결석을 했으며 가끔 통화하는 어머니는 T가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했다. 이제 공부하기 싫어졌다며 중학교 3학년 여름에 공부방을 끊었다.     


T가 고3이 된 해 새벽 6시쯤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잠옷바람에 패딩만 걸치고 부스스한 머리로 분리수거를 하고 있는데 커다란 곰이 다가와 내게 인사했다. 아주 반갑게. 커다란 곰은 여기 맨날 지나다니면서 공부방 보고 있었다며 하하하 웃었다. 왔다 갔다 하는 선생님 머리가 창문너머로 보이면 되게 반가웠다고. 이 새벽에 어디 가냐고 물어보니 독서실에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 커다란 곰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새벽공기를 가르며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봤다. 어긋나지 않고 잘 자랐구나. T의 목소리에는 일상을 단단히 채워나가는 자의 힘이 있었다. T의 눈에는 면도날이 사라졌고 대신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면도날보다 좋은 것이.      


수능 전날, 그 시끄러웠던 천둥벌거숭이들에게 수능엿 먹으라고 공부방으로 오라고 했더니 우르르 몰려와 라면을 끓여달라고 요구했다. 만에 하나 라면 먹고 탈 날까 봐 물을 좀 많이 넣고 혹시나 균을 옮길까 봐 김치는 주지 않았다. 와글와글 라면을 처먹더니 수능전날엔 역시 낮잠이라며 우르르 나갔다. 수능 전날 고3의 가방에는 더러운 문제집과 썩은 체육복과 물티슈와 수험표가 섞여있었다. 그 아이들이 휩쓸고 나간 뒤 조용해지자 T가 찾아왔다.    

 

T는 해맑게 웃으며 고등학교 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했다. 고1 때까지 밤새도록 게임만 하면서 엉망진창으로 살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소리에 매우 민감한 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공부방 다닐 때 애들이 너무 떠들어서 자주 화가 났었다고 했다. 아 그런 거였구나. 내가 그걸 알았어도 걔들을 조용히 시킬 순 없었을 거라고 하자 T도 웃으며 동의했다. 

-그 애들이 너무 떠들긴 했지만 그래도 걔들 자신감은 배울만 했어요. 그건 재능의 영역 같아요. 제가 영어학원에서는 영어로 걔들 이겼거든요. 그때 정말 기분 좋았어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런데 걔는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좋은 자신감이에요.    


T는 담담히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듬뿍 배어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래 생각했고 어떻게 사회와 조율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였다.   

   

아이다웠던 아이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으로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어떤 책이나 영화보다 진실된 재미가 있다. 리얼리즘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굉장한 문화생활이다. 아이들마다 쌓여가는 서사를 잘 읽어내고 거기에서 재미를 찾는 것은 동네수학팔이가 누릴 수 있는 고급취미이다. 이 취미를 계속 즐기기 위해서 현존하는 고객님에게 열심히 수학을 팔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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