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성유지

디지기 싫다고

by 파로암

현아 뛰어야 해!

현이와 나는 저 멀리서 갑자기 나타난 버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버스를 놓치면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이미 주변은 어두워졌고 길거리에서 30분을 버리기엔 둘 다 지쳐서 어떻게든 저 버스를 잡아야 한다. 현이는 날씬하고 가벼운 다리로 버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심박수를 높이지 않기 위해 가능한 보폭을 줄여 서현이 뒤를 쫓아 도도도도 달렸다. 겨우 버스에 올라타서 심박수를 급하게 재어보았더니 130을 훨씬 웃도는 숫자가 찍혔다. 그 숫자를 본 현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의사가 심박수 100 넘기지 말랬는데...

엄마 그냥 다음 버스 탈 걸 그랬어. 대동맥 괜찮아?

대동맥이 터졌던 부근에서 느껴지던 통증의 존재감을 조용히 느껴보았으나 다행히 아무 느낌 없었다. 숨이 좀 잦아들고 다시 심박수를 재어보니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98을 찍자 현이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달리기를 잃어버렸다. 원래부터 달리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개똥벌레와 개똥만큼 다르다. 어쩔 수 없이 뛰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목숨과 상황을 저울질해야 하는 것은 정말 개똥 같다. 울 것 같은 현이 얼굴.


집안일을 하다가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졌다. 뭐지 싶어서 소파에 잠시 누웠다가 일어났는데 잘 걷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어졌다. 몇 번이나 소파에 누웠다가 일어나서 청소하고 누웠다가 설거지하고 누웠다가 화장실청소하고 누웠다가 누웠다가 누웠다가.

수학을 팔면서 아이들 사이를 오고 가는데 걷기가 힘들어서 의자를 손으로 짚어야 했다. 수학을 파는 일도 대동맥에 뺏길까 봐 무서워졌다. 일을 잃으면 대체 우리 가족의 생활은 어찌 되는 거야.


엄마 생일케이크를 사러 집 앞 빵집에 갔다. 케이크 상자를 들고 나오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리는 바람에 케이크를 놓칠뻔했다. 거리에는 손 짚을 데가 없어서 겨우 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왔는데 서방이 왜 얼굴이 허얘 가지고 다 죽어가냐고 물어봤다. 왜 내 얼굴이 허옇게 되고 도대체 왜 직립보행이 이렇게 힘든지 궁금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몸을 눕히고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면 가족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생각했다.

한 달 동안 내가 겪은 증상과 앞뒤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의사를 만나러 갔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마 혈당문제인 것 같은데요.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는 세트예요. 거의 같이 오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의 말을 들었다. 한 달 동안 혈당체크를 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혈당체크기를 주문했고 다음날 새벽 조그만 박스가 집 앞에 도착했다. 재빨리 공복혈당을 체크해 보니 빼도 박도 못하는 완벽한 당뇨수치가 나왔다. 100 이하가 정상이고 내 수치는 156. 혈당체크기를 뜯은 박스와 알코올스왑과 피 뽑는 기계 사이에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다시 피를 뽑았고 132. 다시 피를 뽑아보니 146. 정상범위는 택도 없었다. 내가 겪은 증상은 당뇨에 의한 저혈당쇼크와 딱 맞아떨어졌다. 그날 하루 스무 번 넘도록 손가락 끝을 찔렀다. 몸상태를 기록하는 노트에 작은 핏자국이 끊임없이 새롭게 생겼다. 나는 달리기를 잃었고 달달함도 잃는다.

체중이 늘어서 고혈압으로 인해 대동맥이 터졌고 대동맥 안 터트리려고 체중을 줄였더니 저혈당쇼크가 와서 서 있을 수가 없다. 시발 어쩌라고. 항상성 유지는 내게 큰 숙제가 된다. 항상성을 아이들에게 설명할 때 항상 같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라고 설명하는데 말은 쉽다. 말은. 말은 너무 쉬워서 어디 뭔가를 실컷 때려 부수고 싶다. 뭘 때려 부수지는 못하고 혈당체크기 주변을 어슬렁대며 계속해서 손가락 끝에서 핏방울을 채취한다. 열 손가락 찔러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과연.

매일 아침 손가락에서 피를 보며 혈당을 체크하고 손목에 혈압계를 감아 측정하고 옷을 다 벗고 체중계 위에 올라가고 끼니마다 양배추를 썰어먹고 식후엔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고 카페인 없이 노동과 놀이를 비틀비틀 힘없이 행하는 것은 얼마든지 기꺼이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내게 주문처럼 말하는 ‘그래도 크게 한번 아프면 관리를 해서 오히려 더 오래 산단다’의 그 관리를 나는 잘할 수 있다. 달리기 못하고 술 못 마시고 커피 못 마시고 노래 못하고 춤 못 추고 헬스 못하고 빵떡면쌀밥과일 못 먹는 게 뭔 대수인가. 걸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그릴 수 있는데.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급사한 사람이 많다. 주변인과 주변인의 주변인과 각종 미디어와 책에서 딸을 두고 죽은 엄마의 이야기가 훅 치고 훅훅 치고 들어오는데 그런 사례가 곳곳에 잔뜩이어서 나의 죽음 따위도 결국 평범한 일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하여 불가항력적 상황의 도래를 늦추어 가능한 오래 현이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내 손을 직접 쓰다듬어 주겠다.


나의 현이가 결국 우는 것은 먼, 아주 먼 미래의 일로 만들겠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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