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이 없으면 수련을 하러 간다.
별 일이 있으면 수련을 빠진다.
어떤 날은 수련이 너무 하고 싶고,
또 어떤 날은 약속이 생겨 수련을 자연스레 빠지게 되는 사실에 감사하다.
두 시간 동안 낑낑대며 오만 잡다한 생각과 함께 매트에서 애를 쓴다.
매트 위에서는 그렇게도 하기 싫고 빨리 지나갔으면 했던 아사나가
매트 밖에서는 아, 그래도 한 번 더 시도해 볼걸이라는 아쉬움을 준다.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어서 요가를 한다고 얘기한다.
아사나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도 매트 위에 올라갔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뒤돌면 아사나를 잘하고 싶고
그 욕심에 평정심도 흔들린다.
아쉬탕기들의 단단하고 멋진 몸에 남몰래 감탄한다.
그들의 팔에서 느껴지는 수련의 깊이에 경외심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그러한 근육이 늘어갈수록
사회적 미의 기준에 맞춰지고 싶은 건지, 아니면 아쉬탕기들의 몸이 되고 싶은 건지
헷갈리고 있다.
내가 요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요가는 운동이 아닌 수련이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정작 나는 제대로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냥 운동처럼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일까.
요가는 운동과 다르다고 말한다.
운동이 아닌 ‘수련’이라고.
그렇다면 요가가 수련인 이유가 무엇일까.
나 역시 왜 그들이 수련이라 칭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아마, 타 운동에 비해 몰아치지 않는 속도이기에 내 몸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일까.
주의 깊게 들여다봄으로써 느껴지는 마음의 파동에 흔들리지 말자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다녀서일까.
아니면 그저 전통 깊은 행위를 하는 우리는 특별한 존재라는 감성을 갖고 싶어서
우리끼리 그렇게 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뭔가 있어 보이잖아. 수련이라고 하는 게.
그리고 사실상 정신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받게 되는 것도 맞긴 하다.
일단 침착해야 하며 온 집중을 다해야 하고 자극에 흔들리지 않고 바라볼 줄 아는 멘탈의 힘.
그 힘이 자연스레 길러지긴 했다.
몸은 끊임없이 매트 위에서 움직이지만, 나의 마음은 단단한 뿌리를 내려 몸과 마음 모두 각자의 명상의 모습으로.
그래서 나는 여태 힘든 일이 있을 때 요가 생각이 절실했다.
적어도 매트 위에서만큼은 힘들었던 일들을 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역시 내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의 힘듦이어야만 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힘듦과 그렇지 않은 우울감의 힘듦 중 후자의 경우는
요가로 이겨내야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내가 느끼는 우울감을 어디에다 화풀이해야지 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요가는 내가 궁극적으로 힘들어할 때 도피처가 될 수 없다.
아, 요가를 도피용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인가..?
뭐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힘이 길러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수련하는 이유인가라고 되물어봤을 때 그렇다고 말하기 힘들다.
나는 아직은 정신적 집중보다 아사나에 더 집착하는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요가 수련에서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매트 위에서의 아사나 수련은
수련 단계 중 하위 단계이다.
요가에는 사마디(경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총 8단계가 있는 데
이 단계 중 아사나는 고작 3단계의 수준이다.
요가의 8단계
1단계 : 야마 (Yama) 도덕적 규칙 금계
- 아힘사 (Ahimsa) 비폭력, 불살생
- 사트야 (Satta) 진실, 불망어
- 아스테야 (Asteya) 불투도
- 브라마차리아 (Bramachary) 절제, 금욕
- 아파리그라하 (Aparigraha) 불탐
2단계 : 니야마 (Niyama) 개인적 행위, 권계
3단계 : 아사나 (Asana) 자세
4단계 : 프라나야마 (Pranayama) 호흡
5단계 : 프라티야하라 (Pratyahara) 욕망, 감정 및 외적 대상에 의한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자율 훈련
6단계 : 다라나 (Dharana) 집중통일행법
7단계 : 디야나 (Dhayana) 정려, 명상
8단계 : 사마디 (Samadhi) 삼매, 깨달음
* 삼매 : 주관과 객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올바른 관찰과 마음가짐을 통하여 일체가 되고,
마침내 그 세 가지에 대한 생각까지 잊어버린 경지에 들어간 것
아사나를 완벽히 할 수도 없겠지만, 설사 아사나가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요가의 궁극적 목적인
사마디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마디까지 가기 위한 여정은 평생 동안의 길이어야 하며, 우리가 죽기 전까지 과연 사마디를 깨우치고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 아니 적어도 나는 사마디를 이루자라는 욕심조차 없다.)
끝이 없는 이 여정을 묵묵히 해내가기에 우리는 ‘수련’이라고 칭하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일단 나는 묵묵히 해나갈 자신이 없다.
아사나 집착은 갖고 있으면서 하위 레벨인 아사나조차 해나갈 자신이 없다니.
이렇게 자주 요태기가 오는 것도, 매트 위에서 점점 잡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그렇게 열정적이게 하던 요가를 이제는 휴식기가 필요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도.
묵묵히라기보단 끊임없이 흔들리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 나의 수련의 모습이 될 것 같다.
요즘 들어서 예전의 나보다 요가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은 사실이다.
2024년 갑진년을 맞아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새해를 맞아 열심히 해보자가 아닌 요가를 떠나볼까 라는 마음을 갖다니.
워낙 갈팡질팡 변덕이 심한 나이기에 이런 생각도 몇 달 후에는 또다시 바뀔지도 모르지만,
일단 현재의 나는 수련이 하고 싶어서가 아닌 의무적으로 하는 쪽에 가깝다.
누가 사실상 시킨 것도 아니지만 결국은 나의 순수한 의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닌 수련이기에
점점 지쳐가고 흔들리고 있다.
연례행사로 찾아오던 요태기가 이제는 몇 주 걸러 찾아오는 매달의 불청객이 되었고,
마음이 가질 않으니 신체가 먼저 눈치를 채 실력도 늘질 않고 있으며
발걸음이 움직여지질 않으니 사람들과의 약속 잡기에 급급해지고 있다.
분명 요태기를 극복하고 열정을 불태워보고자 브런치 글을 시작하였으나
브런치에 등단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
나 못지않게 내 브런치를 읽어가는 사람들도 어이없어하겠지.
아니 요가 글을 풀어낸다고 시작한 애가 7화 만에 이런다고?
혹시 모른다.
추후 다시 나의 글들을 돌이켜봤을 때 지금 이러한 흔들리는 모습 또한
괜찮은 추억이라고 되새기며 수련을 이어가는 미래의 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또 막상 그만둬보자!라고 마음을 먹어보자니
수련에 대한 미련이 생기고 아쉽고 그렇다.
아오 짜증 나
도대체 어떠한 부분이 내가 계속 수련에 집착하게 만드는 부분일까.
(내가 수련하는 이유 07-0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