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원체 뻣뻣해 문제였다.
학창 시절 모두가 하는 유연성 테스트에서 늘 꼴찌였고,
몸이 막대기 같단 소리는 항상 들으면서 성장했다.
유연함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고,
타고나지 못한 사람임을 진즉에 받아들였다.
요가 세계에선 '요수저'라는 단어가 있다.
별 노력을 안 해도 어느 정도 타고난 유연한 관절 혹은 힘으로 어려운 아사나들을 척척 해내는 사람들.
내가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다음으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요수저다.
나는 뻣뻣하게 태어나서 남들이 몇 달간 수련하면 만들어내는 아사나를 몇 년 동안 수련해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요수저보단 흙요수저.
흙요수저들은 어쩔 수 없다. 몸이 이렇게 태어났으니 그냥 받아들여야 하지.
그렇지만 억울하고 슬프고 뭐 아무튼 좀 그렇긴 하다.
앞으로도 나는 더욱더 뻣뻣해질 것이고, 물론 지금 현재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뻣뻣하다.
거의 뭐 이것은 하나의 명제다.
요가를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내가 유연하다고 생각하는 데,
동네 사람들 그거 다 착각입니다.
요태기 글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수련을 잠깐만 쉬었다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뻣뻣해지고 근육이 짧아진다.
근육을 늘리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엄청 소요되지만, 나의 원래 상태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은
솜사탕 먹는 것보다도 쉽다.
선생님은 이걸 습(習)의 카르마라고 하신다.
내가 살면서 쌓아왔던 습의 카르마가 현재 내 몸을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
습의 카르마는 내 몸이 쉽게 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카르마가 쌓였던 것이길래 이토록 몸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아무튼간에 좋은 인생을 살진 않았나 보다.
내 카르마는 흉추와 어깨에 몰빵 되어있다.
이만큼 수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의 흉추는 열리지 않았고 어깨는 딱딱하다.
후굴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흉추와 어깨가 열리질 않으니 자연스레 후굴 시 생기는 두려움도 뒤따른다.
부장가아사나를 할 때마다 답답하게 막혀있는 흉추의 느낌을 이겨내랴, 솟아올라 힘이 들어간 어깨를 내리랴
나의 수련은 항상 분주하다.
선생님들은 나의 답답한 흉추 모양을 보고 안타까워하신 적이 많다.
이 가슴만 열리면 될 텐데…
그럼 나는 언제나 여쭙는다.
선생님 도대체 제 흉추는 언제 열리게 될까요?
답은 언제나 같다.
시간만이 답이다. 언젠가는 열릴 것이다. 물론 꾸준히 수련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그 기약 없는 날만을 기다린 지가 벌써 몇 년 째인 지,
물론 아주 완전히 초반의 몸과 비교하였을 때는 차도가 있겠지만
이 정도면 그냥 알아서 눈치껏 좀 열려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 안 듣는 몸아.
척추 측만 때문에 나의 왼쪽과 오른쪽의 불균형은 눈에 도드라질 정도이다.
골반 불균형은 물론이고 어깨 역시 왼쪽 어깨가 눈에 띄게 솟아 있다.
사실 현대인들 중에서 척추 측만은 이상한 질병(?)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점 중 하나이기에 나 역시 10대 때 교정하러 잠깐 도수 치료를 받아 봤을 뿐
그 이후에는 딱히 수술까지 필요하진 않은 상태이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있었다.
허나, 이러한 불균형의 문제는 요가를 시작하면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의 고질적인 왼쪽 어깨와 골반이 내가 평생 갖고 가야 할 카르마가 된 것이다.
부장가아사나 혹은 업독을 할 때 느껴지는 흉추의 느낌에서 왼쪽에 자극을 느끼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말인 즉, 근 5년 동안의 나의 수련에서 나는 여태 흉추를 잘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왼쪽의 자극은 어느 날은 잘 오다가도, 또 다른 날은 아무 느낌이 없는 날이 허다하다.
오른쪽 등의 자극만 주구장창 느끼고 오는 날이 더 많았고, 왼쪽 자극이 오려다 치면 또 사라지고
밀당도 이런 밀당이 없다.
그래도 미약한 자극이 오는 것에라도 감사해야 하는 건지.
이 자극의 간극은 어깨에서 더욱 벌어진다.
문제의 왼쪽 어깨가 과거에는 그저 뻣뻣하고 잘 열리지 않아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했던 상황이라면,
이제는 슬슬 몸이 변화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엄청나게 아프고 당겨온다.
이 고통이 보통 뻣뻣한 사람이 근육을 늘리는 고통 정도가 아닌, 뭔가 신경을 누르고 자극하는
아주 기분 나쁜 고통이라는 게 문제다.
신경을 누르니 자연스레 왼쪽 승모부터 손가락 끝까지 저릿저릿하고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된다.
너무 놀라서 후다닥 아사나에서 빠져나와도 이 저린 감각은 몇십 분이 지난 후에야 서서히 잦아들곤 한다.
안 그래도 고통을 참는 것이 힘들어 하타요가에서도 꾸역꾸역 버텨내는 데
이 말초 신경과 연결된 것인지 뭔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버텨내고 이겨내려니
멘탈이 말도 안 되게 약해진다.
너무 하기 싫고 아프니까.
나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가 그나마 선생님과의 호흡으로 드롭백까지 연결하여
최대한 손과 발의 거리를 좁혀 연습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왜 과거형이냐면 요즘 나의 어깨가 예전처럼 연습할 수 없도록 너무나 심각한 자극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깨가 찝히면서 생기는 기분 나쁨은 물론이요, 삼각근의 그 어느 한 부분이 너무나도 당겨오고
그렇다고 이 고통과 저릿함을 참고 견뎌내자니, 나의 멘탈이 그만큼 독하질 않아
결국은 요즘의 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는 나의 과거로 다시 회귀한 수준이 되었다.
나의 어깨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선생님의 눈빛과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신다는 말은 나에게 위로가 되지만
사실상 가장 속상한 것은 나 자신이다.
시간이 걸릴 것이란 것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란 것도 모두 알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나의 수련은 요즘 너무 이상하고 또 이상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파오는 몸에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 드디어 혹시나
슬슬 가슴이 열리고 어깨가 부드러워지려는 신호일까?
하는 기대감이 함께.
하지만 표면상의 수련은 이전보다 못하는 수준인
그러한 수련을 하고 있다.
샬라에서 함께 수련하는 도반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으면
참 세상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몸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힘겨워하는 아사나가 다른 이에게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들이 쉽게 해내지 못하는 아사나가 나에게 별 부담이 되지 않는 아사나가 되기도 한다.
이러니 아사나에 집착하는 마음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게 맞는 말이다.
갑작스러운 어깨 고통에 풀이 죽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이 따로 내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본인은 지금 나보다도 더 못했었으며, 후굴을 여기까지 만드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심지어 지금도 이틀만 수련을 쉬어도 허리가 너무 아파온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수련하셨을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에 그래도
선생님은 나의 몸을 이해해 주고 기다려주실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요가는 유연해야만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왜냐면 나 같은 사람들도 하고 있고, 더욱이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하는 운동이니까 말이다.
언젠가는 흉추와 어깨가 부드럽게 열리는 과정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