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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스탄트 Aug 21. 2024

멸망한대도 사랑하겠어!

5화 

그레이 컬러 대리석으로 마감된 사무실의 블랙 데스크에 피다 만 시거가 히뿌연 연기를 내며 꺼져가고 있었다. 정수리까지 받쳐주는 가죽 의자가 벽 쪽을 보고 있다 데스크로 돌며 긴 손가락이 다시 시거를 찾았다. 


매서운 눈초리에 날렵한 턱선의 석건우 이사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세련되게 얼굴을 장식했다. 

검지에 끼워져 있는 붉은색 에메랄드 반지는 눈에 띄게 큼직하여 그의 남성스러운 손을 더욱 부각시켰다. 


“나박사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책상 위의 블루투스 스피커폰이 말했다. 


“들여보내요. 차 두 잔도 부탁” 

짧게 말하는 석건우의 검은 눈은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나성대는 약간 긴장한 듯 그의 눈빛을 살폈다. 


“나박사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줄기세포 사업을 좀 더 확장시키고 있는 거 아시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진행이 너무 느려요. 도대체 결과물이 언제 나온다는 거죠?”


문 열리는 소리에 석건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비서가 차를 들고 들어 왔고 나성대는 야릇한 눈빛으로 비서를 쳐다봤다. 나성대의 눈빛을 의식한 비서는 찻잔을 자리에 놓자마자 빨리 나갔다. 


“나박사님께서 총괄 관리인으로서 책임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리고 인체 모든 조직들을 배양하고 더 나아가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어서 계급별로 말이죠. 우선은 노동자 계급을 먼저 만들어 보는 것으로 플랜을 잡았었죠. 좀 더 구체적인 사안들이 결정돼야 합니다. 나박사님 아시겠어요? 결국에는 국가 재건의 문제입니다. 좀 더 강력한 국력의 새로운 국가!” 


석건우는 찻잔을 내려놓고 책상으로 돌아가 시거에 불을 붙였다.  


“ 아무래도 대외비로 진행하고 있는 만큼 철저하게 진행하다 보니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실 수 있습니다. 걱정 끼치지 않게 최대한 속도를 내보겠습니다.” 


“그 뇌과학 박사 이름이 뭐라고 했죠? 그 부소장 팀원으로 합류 한건가요?”


시거를 한 모금 빨고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나성대에게 물었다. 


“아, 구해성 박사 말씀 하시는 거죠? 그게, 지금 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출근도 못 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병원에는 왜요?” 


“자세한 내용은 검사 결과 나오면 알 수 있는데 가벼운 쇼크로 알고 있습니다.”

라며 석건우를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 없게 대답했다. 

  

“빨리 프로젝트에 합류시키세요. 우리 국민들에게 필요한 분입니다. 다음 미팅은 언제 가능하세요?” 


“다음 미팅은 제가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구해성 박사를 만나본 후 구체적인 진행 사항이 나온다면 같이 오겠습니다.”


*


해성이 무거운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구박사님, 괜찮으세요?”라고 다급하게 뛰어오는 우주의 얼굴이 시야를 가렸다. 


그런데 갑자기 또 가슴이 뛰고 어지러웠다. 해성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감은 눈에 그의 잔상이 남아 지금 그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저, 물 좀 주세요.”라고 힘없이 말했다. 


우주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빨대를 꽂고 침대 오른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해성의 상체가 서서히 세워지기 시작했다. 


“자… 물 마시세요.” 


해성은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저 병원에 얼마나 있었죠?”


“두 시간 정도 됐어요. 담당 의사가 경과를 들고 올 거예요.” 


병실 자동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들어왔다. 


“구해성 씨, 지금은 좀 어떠세요?”라고 하면서 그녀의 동공을 살펴보았다. 


“아직도 약간 어지러워요.”라고 말하며 의사를 바라봤다. 


“검사결과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보통은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딱히 어떤 이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최근에 너무 과로를 하셨다거나 수면시간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라며 의사는 해성의 차트를 자세히 보며 말했다. 


“구해성 씨, 혹시 최근에 신체반응 중에서 뭔가 다른 부분이 느껴졌었나요?” 


“음… 신체반응… 없는데요.”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손우주를 만났을 때의 가슴 두근거림과 홍조 띤 얼굴이 생각났다. 그러나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어지럽다고 하시니까, 좀 더 안정을 취한 후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보호자 세요?” 라며 손우주를 쳐다봤다. 


“네, 보호자입니다.” 


“귀가하실 때 댁까지 모셔다 주셔야 합니다. 언제 갑자기 쇼크가 올지 모르고. 지금으로서는 딱히 병명이 없어서요.” 의사는  손바닥 보다 약간 큰 초소형 패드를 끄며 말했다. 


의사가 병실을 나가자 해성은 다시 눈을 감았다. 


“구박사님, 아직도 어지러우세요? 메슥거리는 건요?” 우주는 그녀의 안색을 살펴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아.. 오늘 미팅 있었는데.” 


“그렇잖아도 오늘 미팅 때문에 전화가 왔었는데 제가 받고 급한 일정이 생겨서 다음으로 미뤄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내일 다시 전화 올 겁니다. 중요한 건 미팅이 아니니 우선 몸 걱정이나 해요.” 


해성은 우주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날까 두려웠다.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제 동생 불러서 오면 같이 갈게요.” 라며 핸드폰을 들었다.


“구박사님, 아닙니다.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간절하게 말하는 우주였다. 


결국 우주의 끈질긴 설득 끝에 해성은 그의 차로 집에 도착했다. 


“여성분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들어오는 게 실례인 줄은 알지만 오늘은 환자 보호자로 왔습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해 주시면 선물도 들고 오겠습니다.”


“네.” 해성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아니, 뭐가 ‘네’야. 아니, 왜 이렇게 내 의지대로 대답이 안 나가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손박사님, 감사해요. 집에 오니까 한결 편안해졌어요. 오늘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들어가 보세요.” 해성이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그럴게요. 가기 전에 뭐 침실에 물이라도 챙겨 올까요?” 라며 우주는 주위를 살폈다. 


“괜찮아요. 이제 제가 천천히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더 이상 명분이 없어진 우주는 그녀의 안색을 살핀 후 돌아섰다. 


“얼굴빛이 괜찮은 것 같으니 저는 그럼 가겠습니다. 몸 잘 챙기세요.” 

해성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우주가 말렸다. 멀어지는 발소리에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 해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야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석건우는 은밀한 모임을 하고 있는 장소에 지금 막 도착했다. 룸에는 이미 남자 셋과 여자 세 명이 VR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여러분 다시 시작합시다. 제가 좀 늦었어요.”


사람들이 짜증 난 얼굴로 일제히 VR 안경을 벗었다. 


“리셋합시다. 건우 왔으니까 다시 하죠.”  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와이셔츠를 풀어헤친 남자가 말했다. 


“그럼 한 잔 하고 다시 시작해요.” 


탱크톱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말했다. 고급 위스키를 일곱 개의 스트레이트 잔에 따랐다. 


“자, 잔을 드시고, 우리의 도파민을 위하여!” 다 같이 위스키를 마셨다. 


이들은 단체로 VR 게임을 하고 있었다. 삼십여분 정도 술 마시며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커플을 이뤄 룸으로 들어갔고 밖으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녀가 함께 하는 섹스가 사라진 지 오래됐지만 기구를 이용해 서로를 도와주는 VR 세계에서 더 자극적으로 서로의 욕구를 해소고 있었다. 


석건우는 룸에 혼자 들어갔다. 뭔가 욕구가 사라졌는지 VR을 벗어던지고 시거 커터기로 끝을 잘라 냈다. 그리고 소파에 그대로 누워 시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


우주는 양평으로 가는 길을 감상하며 음악을 선곡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R&B 음악이 듣고 싶었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손우진” 자동차 실내 디스플레이에 전화벨이 울렸다. 


“어, 우진아 거의 다 왔어. 왜 뭐 사갈 거 있어?” 


우주의 집은 양평에서도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마트를 가기 쉽지 않았다. 


“커피 원두가 떨어졌다고 하시는데. 내가 근처 마트 검색했더니 G마트에 있더라. 거기가 제일 가까워. 들렀다 와.” 


“알았어. 원두만 필요한 거야?”


“우리 마실 맥주도 좀 사 와.” 라며 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그렇지. 금방 사갈게.” 


자동으로 주차장 문이 열렸고 정원으로 연결된 길로 걸어갔다. 우진이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승미와 민수는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저 왔어요. 엄마, 아빠!”

 

“아들 왔어.” 라며 민수는 그의 짐을 받아 들었다. 


“와아, 냄새가 좋은데요. 저녁 먹고 찜질방도 준비된 건가요?” 


“그렇잖아도 너 온다고 만반의 준비를 해 놨지.”라고 민수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온 가족이 찜질방으로 모였다. 승미와 민수는 시원한 아이스티를 준비했고 우주와 우진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 오랜만에 모였는데 내일 아침상 차리기 게임 어때요?” 우진이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난 좋아. 져보질 않아서. 아침을 해주고 싶어도 못 하니 원…” 민수는 자신감이 넘쳤다. 


“네 아빠 말하는 거 얄미워서 오늘은 내가 이겨야겠다.” 라며 팔을 걷어붙이며 민수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3D 안경을 썼고 바닥에 깔린 보드판 주변으로 모였다. 우주가 핸드폰을 보드판에 비추자 3D 홀로그램으로 게임 리스트가 떴다. 


“올드 스쿨 게임으로 갈까요? 아님 저번에 했던 걸로 할까요?”라고 우진이 물었다. 


“보드게임의 시조 젠가로 하자. 오늘은 나의 섬세함을 보여주겠어.” 라며 승미가 의지를 불태웠다. 


우주가 핸드폰을 클릭하자 보드판 위로 AR 젠가 홀로그램이 성인 무릎높이만큼 높게 만들어졌다. 

이젠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될 차례였다. 


온 가족이 아주 조심스럽게 막대를 빼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 시대에는 보기 힘든 가족 문화였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즐겁게 게임하던 넷은 잠시 쉬기로 했다. 


“엄마, 저 해성 씨 만났어요.” 말하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반지는? 잘 설명했어? 오해하지 않게 잘 줬니?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해성이 엄마하고 통화했는데.” 

우주의 얼굴을 살폈다. 


“음…그래서 저를 기억은 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우주는 말했다. 


“형, VR로 만나고 있었다는 그런 말 하지 마라. 변태로 오해받을걸.” 우진이 놀리듯 말했다. 


“다시 보니 좋니?” 민수가 물었다. 


“네, 좋았어요.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럽던데. 해성 씨와 제가 사랑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너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 것 같지만 서두르지 말고 잘해봐.” 


승미가 우주의 어깨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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