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끈 떨어진 연.

by 소원 이의정

#13

공항버스 안에서 그가 타고 갈 비행기 시간표를 확인한 후 나는 탑승수속하는 곳을 찾아 헤맸다.

'필릭스, 왜 전화 안 받아.' 나는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길게 늘어선 탑승수속 데스크에는 필릭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와 닮은 사람을 보고 뒤따라가다 그 사람을 잡았는데 필릭스는 아니었다.

"I'm sorry. sorry."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필릭스는 보안 검색대를 지나기 위해 여권을 확인받고 짐을 올려놓고 있었다.

"모바일폰도 넣으세요." 검색대원이 말했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 있던 폰을 올려놓으려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가은의 전화가 여러 번 찍혀 있었다. 그리고 문자를 확인하니 가은이 공항에 있었다.

"I'm sorry. excuse me. sorry."

검색대원에게서 짐을 다시 찾고 늘어선 줄을 뒤로하고 다시 입구 쪽으로 나왔다.

'가은 전화받아.' 필릭스는 가은에게 전화를 했다.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일어서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필릭스였다.

"필릭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디야. 나 공항 왔어."

"가은. 미안해. OMG 어디야?

나는 그가 있는 게이트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있었다.

그는 나를 들어 올려 안았고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가은. 어떻게 된 거야? 회사 아니었어?"

"어. 그래도 출국하는 필릭스를 보고 싶어서. 잘 얘기하고 나왔어."

그는 커다란 두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Okay, 여기서 적어도 30분은 있을 수 있어. 저쪽 가서 앉을까?"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2개월간은 홈스테이를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그에게 주소를 알려주고 지도로 위치를 확인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유학원에서 준비해 놓은 집을 갑자기 캔슬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연인이 된 필릭스의 집에 들어가는 건 더 하기 싫은 일이었다.

"가은. 그럼 홈스테이 계약 끝나면 우리 집으로 와."

"그건 그때 생각해 보자."

"그래.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자."

나는 준비한 선물을 그에게 주었다.

"비행기 안에서 열어봐."

"가은. 언제 준비했어? 고마워."


그는 출국을 해야 했다. 30분은 금방 지나갔고 우리는 검색대 앞 게이트로 다시 걸어갔다.

"조심히 잘 가. 사랑해. 필릭스."

"가은. 나도 사랑해. 준비 잘하고 영국에서 봐. 공항으로 나갈게."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고 내가 더 질척대면 그가 힘들어질 것 같아. 쿨한 척 연기를 했다.

"들어가. 필릭스."

"Okay. 가은. 내가 아침에 전화할게. 이따 봐."

"Okay. 잘 가. 필릭스."

검색대 게이트로 들어가고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필릭스의 영상통화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고 그는 비행기 탑승 전까지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Bye. Felix. See you soon."

"Bye. 가은. I love you."


필릭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은이 준 선물을 열어봤다. 며칠 전에 포토박스에서 가은과 찍은 사진을 붙인 여성용 향수였다. '여성용 향수?' 편지도 함께 있었다.

'Dear, Felix. 내가 즐겨 쓰고 있는 향수야. 내 향이 그리울 때 침실에 뿌려줘. 항상 당신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사랑해. From, 가은'

필릭스는 향을 살짝 음미했다. 가은의 향이었다.

'아... 가은... 당신이 너무도 그립군.' 그리고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무더운 여름 날씨였다. 질질 짜고 슬퍼하면 내 몸이 더 습해질 것 같았다.

'못 볼 것도 아니고 곧 만날 거니까. 힘내자.'

공항버스를 타니 갑자기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편안하게 숙면을 하고 전화기 알람이 울려 일어났다. 집 근처에 도착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박지호? 뭐야. 왜 전화하는 거야?'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걷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를 보았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도대체 왜 온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난 할 말도 없는데.' 가은은 손에 들고 있는 물을 마셨다.


"여긴 무슨 일이야?"

"가은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30분만 어디 가서 앉아서 얘기 좀 하자."

'가은에게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빌자. 다시 그녀가 나를 받아줄 수 있을까?' 지호의 속마음이 들렸다.

"무슨 얘기.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 무슨 할 말이 있어?"

"어 할 말 있어. 그런데 여기서는 좀 그래. 가까운 커피숍이라도 들어가자."

'가은아. 제발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제발.' 그의 속마음이 말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집 앞에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어 스벅으로 들어갔다.


"말해봐.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가은아. 정말 미안해. 용서해 줘. 나 정말 너 없이 살 수 없어. 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정리할 수 있어. 네가 원하면 전부 자세하게 말해줄게."

'가은이한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다는 거? 곧 이혼할 거라는 거? 왜 이렇게 혼란스럽지. 갑자기 너란 여자를 모르겠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지호 씨.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난 알아 지호 씨를... 그런데... 그럴만한 사정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어. 진짜 별개의 문제야. 그러니까 이젠 다신 나 찾아오지 마. 부탁이야."

"가은아. 너 왜 이렇게 냉정하니. 나 이혼할 거야. 그리고 다시 너에게 돌아가고 싶어. 너도 알잖아.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정말 실수였는데... 난 그 실수를 내가 책임지려 했거든. 그런데 모든 게 다시 원점이야. 돌이킬 수 없다는 거 알아. 나를 용서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진짜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어?"

'가은아 네가 그리워. 나 다시 되돌리고 싶다고. 너를 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 나 너무 우울해. 죽고 싶어...' 그의 속마음은 애타게 나를 원하고 있었다.

"지호 씨. 아니야. 내 마음에 이젠 지호 씨가 없어. 그리고 이제 와서 어쩌자고. 우리 헤어지고 나 많이 힘들었어. 두 번 힘들게 하지 마. 아니 이 경우는 힘든 게 아니라 짜증 나.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난 도저히 그의 마음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온통 나를 찾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었다.

"나 일어설게. 출장 다녀와서 많이 피곤해." 그때 영상전화가 왔다.

"잘 가. 다신 찾아오지 마." 지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데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다.

전화는 끊겼다.

'아... 필릭스 일 텐데.'


"다녀왔습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방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엄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살짝 문을 열고 말했다.

"먹고 왔어요. 저 먼저 쉴게요. 출장 다녀와서 그런가 피곤해."

나는 문을 잠갔다. 동생 민주는 시도 때도 없이 노크도 안 하고 문을 여는 아이였다.

필릭스에게 바로 영상 전화를 걸었다.

"Hey, babe. how are you?" 그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Hi. I'm good. 방금 집에 왔어요. 아까는 집으로 오는 길이라 못 받았어." 지호와의 일이 신경 쓰였지만 그에게 이런 일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은, 선물 고마워. 그 향을 맡고 있으면 네가 더 그리워. 너 정말 스마트해." 그는 나에게 여우라며 놀려댔다.

"그러라고 내 향을 선물하 거야. 난 필릭스의 모든 것을 마음에 저장했거든."

"Oh! 그거 좋네. 나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옆에 어떤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Hi. 백작님의 공주는 누구신지? 소개 좀 해줘." 필릭스는 그를 제어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한 눈치였다.

'백작님? 이게 무슨 말이지?'

"I'm So Sorry. 가은. 직장 동료 막스야. 저번에 통화했던 친구. 기억나?"

" 어.. 기억나요. 괜찮아요. 그런데 백작이라니 무슨 말이야?"

"저 친구가 장난이 좀 심해. 신경 쓰지 마. 나 가봐야 해. 가은. 잘 자. I love you."

"필릭스. I love you too."


문자 알림음이 왔다. 지호였다.

'가은아. 나 다음 달에 합의 이혼해. 너에게 창피한 말이지만 난 사기 결혼을 당한 피해자라 소송을 할까도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렇게까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합의 이혼 하기로 했어. 물론 우리가 예전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 기회를 줄 순 없겠니? 네가 답변 줄 때까지 기다릴게. 늦어도 좋아. 잘 자. 사랑해.'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건지 너무 화가 났다. 아까 지호 앞에서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가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할까 봐 걱정이 됐었다. 태국에 있는 지호 부모님과 친했고 특히 그의 엄마를 생각하면 그가 마음을 추스르고 건강한 생각을 하길 바랐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걸까?'


국제전화번호가 떴다. 갑자기 영국 국가번호가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가은이니? 가은아 나다. 지호 엄마. 잘 지내니?"

"아. 어머님!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어 그래. 가은아. 조만간 얼굴 한 번 보자. 너도 들었겠지만. 그래 지호가 백번 잘못했지.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가은아. 지호가 부탁하더라. 나랑 너랑 친하니까 너를 설득해 줄 수 있겠냐고.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전화했다. 가은이 많이 상처받았을 텐데. 남자들 살다 보면 실수하거든. 이번에 좀 봐줄 수 있을까? 내가 다 미안하다."

"아... 어머님. 그게... 어머니. 저 영국으로 유학가요. 지호 씨랑 헤어지고 생각해 보니 꿈을 찾아야겠다. 뭐 그런 각오가 생겼어요.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하고 일도 해보고 그럴까 해요. 이미 수속 절차 다 받아놓고. 영국 어학원 신청받아서 영국 입국 준비까지 끝났어요. 더 늦기 전에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어서..."

"어... 가은아... 그랬구나..."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말을 잊지 못했다.

"가은이 유학 가는구나. 그래. 아직 젊고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어머니, 죄송해요. 그리고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 지호 씨가 헛된 희망 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실 오늘 집으로 찾아왔더라고요. 우울해 보이고 너무 힘들어해서 남자친구 생겼다는 말을 차마 못 했어요. 나중에 지호 씨 괜찮아지면 어머니께서 잘 타일러주세요. 죄송해요. 이런 말씀드려서."

"네가 뭐가 죄송하니. 나도 눈치껏 어떤 상황인지는 안다. 잘못을 해도 지호가 잘못했지. 그랬구나... 가은아 건강하게 잘 다녀와라. 공부 잘 끝내고. 그리고 너랑 나는 지호를 떠나서. 태국 오면 언제든지 와."

"네... 어머니. 건강하세요. 정말 죄송해요. 우리... 좋은 모습 보이고 싶었는데..."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어머님의 마음을 알기에 상처를 준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가은아. 아냐. 공부 잘하고 오렴. 언제든 연락하고. 이만 끊을게."


인연은 무엇일까?

그때는 세상의 전부가 지호였다. 우리는 불같은 사랑을 했고 사랑의 쾌락을 안다기보다는 그저 서로의 몸을 호기심으로 대했었다. 그래도 우린 순수했고 나름의 행복이 있었다.

그의 부모님과 스스럼없이 대하며 가족같이 편하게 지냈었는데. 인연이 끈 떨어진 연처럼 허무하게 날아가버린다. 공중위로...

마음이 괴로웠다. 왜 그는 그런 머저리 같은 결정을 내렸던 걸까?

그의 그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우린 아마도 결혼을 하고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잘 살았을 것이다.


이후 지호는 가끔 술에 취해 저녁에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에는 받아 보기도 했지만 매번 똑 같이 돌아와 달라는 애원하는 투정이 듣기 싫어 받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께서는 지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