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한국 생활 정리

by 소원 이의정

#14

"대표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 많이 배우고 성장한 것 같아 뿌듯해요."

"서프로, 고생 많았어. 워낙 일을 잘하니 일도 많았을 텐데. 잘 해냈어. 그… 유학을 꼭 가야 하나?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어? 연봉을 더 올려줄 생각이야."


'로드맵 투어'의 대표 황민호는 28세에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5년 만에 국내 최고의 여행포털 사이트를 만들 정도로 엄청난 수완을 갖은 사람이었다. 진하게 생긴 그는 중앙아시아의 혼혈이라고 해도 믿길 만큼 인상적인 이목구비로 남성적인 인상이 강했다. 사업에 몰입하느라 아직 싱글인 황민호는 서가은이 퇴사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 말씀 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추천서까지 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대표님."

"그래? 생각이 바뀔 거 같진 않군. 좋은 인재를 놓치는 것 같아. 회사로써는 손실이야. 아무쪼록 잘 다녀와. 영국 다녀와도 우리 회사에서 일할 생각 있음 연락하고."

"네. 대표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아참. 서프로. 이거." 그는 명함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뭔가요?"

"나랑 절친이 런던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그쪽으로 연락해 봐. 서프로 얘기는 잘해놨어. 혹시 몰라서. 영국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급하게 도움 받을 일이 생길 거 아냐. 비상용으로 챙겨둬. 꼭 필요할 데가 있을 거야."

"대표님... 이렇게까지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실을 나오면서 눈물을 훔쳤다.

자리로 돌아가 오늘까지 마무리할 일들을 정리한 후 짐을 정리했다.

동기들 몇 명과 함께 프로젝트 작업을 했던 후배 몇 명은 송별회를 한다고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는 회사 근처 분위기 좋은 술집으로 갔다.

"서프로, 갑자기 이렇게 떠나는 거 정말 반칙이야. 앞으로 서프로 했던 일을 누가 맡게 될지 참..." 동기 중 한 명이 내가 떠나는 것보다 나중에 뒤처리할 것이 걱정이라는 투로 말했다.

"아니, 누가 해도 하겠지. 오늘 같은 날은 일 얘기하지 말자. 가은.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했던 거야. 대표님이 추천서까지 써줬다며?"

우리는 과거 좋은 추억을 쌓았던 이야기부터 시작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오늘은 기분이 좋아 맥주가 잘 흡수되고 있었다. 영상통화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필릭스."

"어머. 뭐야. 지금 영어로 말하는 거? 누구?" 옆에 있던 동기가 말했다.

"가은. 어디야? 술 마셨어?" 주변 동기와 후배들은 외국인 남자가 보이자 서로 보겠다고 기웃거렸다.

"뭐야. 가은. 배우야? 엄청 섹시하다." 지금 막 잠에서 깬 필릭스의 모습이 정말 섹시해 보이기도 했다.

"잠시만요. 아... 김프로 잠시만." 나는 테이블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필릭스. 나 오늘 회사 마지막 날이에요. 송별회 한다고 해서 지금 맥주 마시고 있었어."

"아! 가은. 그런데 많이 취한 거 같아 보여. 괜찮아?"

"어. 괜찮아. 오늘은 좀 마시긴 했네... 필릭스 너무 보고 싶어. 히잉..."

"가은. 나 너무 걱정돼. 그만 마시고 들어갔으면 좋겠어. 내가 가줄 수도 없고. 아까 보니까 남자들도 많던데. 부탁이야. 빨리 들어가."

"이... 잉. 필릭스 보고 싶어."

"어. 나도 보고 싶어. 가은. 정신 차리고 어서 집에 가. 집에 가서 다시 영상통화해."

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본 후 알았다고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가니 외국인 남자친구까지 있었다고 다들 난리였다.

"가은. 어떻게 된 거야? 결혼할 사람 있다고 하더니. 외국인이었어?"

"그게. 어... 필릭스. 영국 사람이에요."

"그래서 영국으로 유학 가는 거야? 왜 그렇게 응큼해. 와아 이건 대박사건인데."

"자. 여러분 오늘 송별회잖아요. 제 남자 친구 얘기는 그만하고 저의 마지막 날을 기념해 주세요."

다들 너무 많이 마신 듯 보였고 마지막 남은 맥주를 마신 후 나도 내가 걱정스러웠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나왔다.


광교로 가는 버스를 탄 후 한 숨 자니 더 취기가 돌았다. 정말 오랜만에 취한 기분이 들었다.

'아... 너무 많이 마셨어. 속이 메스 꺼리네.'

"가은아. 괜찮아?" 길가에 서서 오바이트하던 내 등을 두드리며 지호가 옆으로 왔다.

"어. 아... 지호 씨. 어쩐 일이야."

"네가 답변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서. 답답해서 왔어. 이렇게 불쑥이라도 와야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진짜 너 왜 이러니. 차라리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은 추억이라도 있었잖아.'

"지호 씨. 진짜 왜 이래. 내가 답변이 없는걸 꼭 확인해야겠어? 내가 말했잖아. 이젠 내 마음에 지호 씨 자리는 없다고. 그리고 나 남자친구 있어." 그는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 뭐 하는 사람이야.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내 친구 김민재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야.'

"아니 지호 씨 모르는 사람이고. 내가 많이 사랑하고 있어." 뭐지? 이 못 믿겠다는 눈치는.


마침 필릭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확인을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앞에서 당당하게 전화를 받았다.

"Hey, 가은. Are you okay?"

"Yes. 지금 집 앞이에요. 그리고 전 남자친구가 찾아와서 잠시 얘기 나누고 있었어." 나는 일부로 필릭스에게 지호를 소개했다. 지호는 엄청 당황하며 눈이 동그래졌다.

"Hi. 그러니까 네가 전 남자 친구이구나. 내 여자친구 집 앞에서 뭐 하는 거지?"

"어.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지호는 냉담하게 얘기했다.

"지호 씨. 여긴 필릭스. 내 남자친구야. (지호를 보며)그리고 나 9월 말에 영국으로 출국해. 필릭스. 내가 곧 다시 전화할게요. 좀 기다려요."

"Sure. I'll wait."


지호는 약간 벙벙한 눈치였다.

"할 말이 뭐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저 남자 언제부터 만난 거?"

"치.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나를 지금 똑같이 보려고 하네. 어이없네. 지난번에 출장 갔다 우연하게 만났어. 인연이라고 생각해. 말했잖아. 지호 씨 자리 내 마음에 전혀 없다고."

"너... 가은아. 지금 일부로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영국 간다는 건 무슨 말이야."

"영국 유학 준비했었어. 오히려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나 떠나고 나도 뭐라도 다시 새롭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에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거야. 고맙게도."

"가은아." 그는 강하게 내 양쪽 팔을 잡고 그에게로 잡아당겼다.

"왜! 왜!" 나는 그를 뿌리쳤다.

"가은이. 너. 지금 한 말들이 전부... 그러니까 너 영국 가는 것도 전부 진심이야?"

"그래! 그러니까 이젠 그만 좀 질척거려. 좋은 추억으로라도 남기고 싶다면."

필릭스로부터 또 전화가 오고 있었다.

"나 들어갈게. 조심해서 가. 그리고 제발 그만 찾아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 집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왔다. 그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놀이터로 향했다.


"필릭스. 오늘 미안해. 점심은?" 그는 약간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섹시하고 귀여웠다.

"아직 못 먹었어. 가은이 그러고 있으니 걱정이 돼서.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아."

"No way. 자기 좋아하는 터키 샌드위치 사 먹어요. 어서."

"(흐뭇하게 웃으며 가은을 쳐다보다) 가은. 아까 그 친구는 전 남자 친구인데 왜 온 거야?"

"어... 내가 영국으로 곧 출국한다고 하니. 인사하고 싶다고 찾아왔어. 별일 아냐."

"가은. 진짜 혼자 어디 못 돌아다니게 해야 하겠어. 영국 오면 더 걱정이군."

나는 그의 장난기 있는 걱정이 가득하다는 얼굴이 너무 웃겨 기분 좋게 웃었다.

"필릭스. 오늘 회사 마지막 날인데 기분이 시원섭섭했어. 우리 회사 대표님이 대학원 입학 추천서까지 써주시고.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 동료들도 많이 고맙고."

"그래. 고마운 분이네. 나중에 꼭 보답해야지. 가은. 나 가봐야겠어. 찾는다."

"Okay. 수고해요."

"I Love you. 가은."

"Me too." 그는 런던 시내가 보이는 사무실 안에서 반대편을 보며 빠르게 나갔다.


나는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불금이라 그런지 민재도 시끄러운 장소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가은아. 웬일이야."

"민재야. 회식 중이야? 나중에 전화할까?"

"아니. 괜찮아. (그는 시끄러운 술집을 나가며 말했다) 잘 지냈지? 출장은 잘 다녀왔어?"

"어. 민재야 나 영국으로 곧 출국해. 9월 말에."

"어!? (그는 너무 놀라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라고? 영국에 간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준비 중이었어. 너한테도 살짝 말했던 거 같은데. 영국에서 공부 좀 하려고."

"야. 가은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너 어디야? 나 곧 광교로 내려갈게. 얼굴 보고 얘기하자."

"나 이미 내려왔어. 그리고 너랑 이야기하면서 우리 동네 놀이터거든. 모기한테 엄청 뜯기고 있어. 다음에 보자."

"이런. 집에 들어가서 약 발라. 알았어. 그럼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조만간 출국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두려움이 더 커졌지만 아직은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인생은 모험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모험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젊음은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이가 먹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방인의 삶.

책임질 사람이 없는 싱글일 때 할 수 있는 도전.

그 새로운 도전이 내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지수이지만. 두려움보다는 희망을 생각하며 나갈 것이다. 그게 서가은이다.

내가 나를 보호하고 바짝 긴장하는 새로운 삶을 응원한다.